△해전리는 완주군 서쪽 일부 끄트머리로, 주민은 익산시 삼포-덕실-용연-오산-인수리, 만경강 건너 조촌·백구와 가깝게 지낸다. △동상면 검태는 논 한 뙈기 없는 두메이고, 해전리는 작대기 하나 벨 산 없는 들판으로 양측은 멀고멀어 생활이 너무나도 달라 혼인한 일이 드물다. △여러 지역 체육대회 때 육상경기 우승은 해전리가 독차지했다. △해전리에서 삼례역까지 2km 이상이고, 춘포역은 3km가 넘는다. 통학생은 아침저녁 이 거리를 달렸으므로 모두 건각들이었다. △우수개 소리지만 ‘초상집 마당에서 밥 가장 많이 잘 먹기로는 해전청년들’이라고 했다. △해전리는 알다시피 산이 없어 장례 때 묘 쓰기가 가장 어려워 이게 평야부의 단점이다. △이 들판에서 광작하는 부농들이야 짚이 많아 땔감 걱정이 없지만, 소농은 만경강 둑 넘어 갈대를 뜯어다 땔 수밖에 없었다. 갈대를 베고 보면 모래흙이 고와 곡식을 심고 가꿔 수확을 했다. △서해 조수가 여기까지 밀려들어 ‘바다 소금기가 섞여 있는 밭(땅)’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 ‘해전리’이다. 30년 전 여름철이면 근동은 물론이고 모래찜을 하려고 저 멀리 화산 분들도 여기를 찾았다. 늦게 도착하면 자리가 없어 밀밭 고랑 모래를 파고 들어갔다. △세월이 흘러 만경강 상류에 둑을 쌓고 하천관리가 잘 되면서부터 몽근 모래는 사라졌으며 또한 나라에서 법으로 엄하게 관리하여 사람 범접을 막아 지금은 땅 한 평 씨 뿌리지를 못한다. △둔치 농사에 익숙했던 노동력이 논으로 옮겨질 수밖에 없어 이게 과학영농으로 발전, 비닐(온실)하우스가 온 들판을 뒤덮었다. △겨울철 해전에 이르면 논바닥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대부분 비닐하우스가 마치 ‘바다’로 보인다. 이름치고는 ‘해전(海田)’ 이렇게 적중할 수 없다. △일화도 많다. ‘춘포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느니 차라리 한 발이라도 더 줄이자’며 걸어 이리(지금 익산시) 구시장을 한나절에 오고 가기 보통이었다. △해전 231번지 16의 경주김씨(신태로:申泰魯 처)와 파평윤씨(신범균:申範均 처) 고부 열효각(烈孝閣)을 직접 가봤다. 이 연혁을 두고 직접 여기를 거론한 건 아니지만 근래 전남 아무개가 옛날 신문을 인용하며 ‘모성공회’를 달갑지 않게 지적하여 자손들과 뜻있는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원해전-중해전-장연마을로 장가들고 시집오면 싱싱한 농작물로 몸 건강 살림 튼튼, 큰 밑천 잡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여기저기로 새 길이 쭉쭉 뻗어나 뛰고 달릴 필요 없이 느슨하게 살아도 편하게 되었다. 멋진 마을이다. 둑길을 거닐며 미래를 설계해 보자. / 이승철 = 칼럼니스트,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최종편집: 2025-06-24 17: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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