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는 말 - 함께 알고 대접하자는 뜻
--------------------------------
‘전라감영 복원사업’에 따라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옛 도청 콘크리트 낡은 건물이 헐리고, 한옥 새 집 여러 채가 들어서며 ‘선화당(宣化堂)’이 우뚝하니, 조선시대 전라 방백(方伯:관찰사·감사)과 관원들의 활동상이 머리에 쉬 떠오른다.
사람도 마찬가지, 옛 명성이나 그 흔적을 이처럼 되찾아 들어내면 이게 바로 ‘역사의 재조명’이니 떳떳한 일이다. 우리 고장에 그런 사람 누구일까?
완주군 삼례읍 출신 김춘배(金春培:1906∼1942) 의사가 그런 인물이다.
=============================
■ 김춘배 의사, 완주 삼례서 태어나
-----------------------------
김춘배는 1906년 2월 29일 삼례읍 삼례리 138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적지와 삼례제일교회 번지수가 똑같다.
본관은 김해 김씨다. 김춘배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아버지, 작은아버지 모두가 1800년대 말부터 1900년 초 예수를 믿기 시작하여 현재 삼례제일교회 초대 영수(領袖)와 장로를 지낸 집안이다.
1910년 나라를 빼앗기고 7∼8년 동안 견디다보니 ‘이래선 아니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 5형제가 식구를 거느리고 1918년 간도로 이사했다.
=============================
■ 간도에서의 삶
-----------------------------
아버지 김창언(金昌彦:1873∼1942)은 옷감장사를 하였고, 형 김성배 목사는 독립 운동가였다.
김춘배는 괄괄한 성격에 의협심이 강하여 그냥 지낼 수 없는 청년. 1927년 2월 독립군 정의부(正義府)에 자진 가담하여 무기를 들었으며, 여러모로 활동하는 가운데 간도 일본영사관을 습격, 쾌재(快哉)를 불렀다.
당시 독립운동 형태가 △안중근 의사처럼 왜적을 암살하거나 △안창호 선생처럼 교육 계몽 강연 △김좌진 장군·김일성처럼 무력투쟁 등 여럿이다. 김춘배는 이런 상황과 추세를 비교 분석해 적극적인 무력투쟁을 펼쳐나갔다.
==================================
■ 감옥! 이까짓 것 담장쯤이야? 탈옥 성공
----------------------------------
일본 영사관을 습격한 행동대원 신분이 들어나자 결국 청진지방법원에서 6년형을 받았고, 복역 중 탈옥하여 멀리 빠져나갔으나, 13일 만에 다시 잡혀 1년 10월형이 더해져(가중) 서울서대문형무소에 수감돼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34년 5월 4일 만기 출소, 7년 10월 만에 부모와 형이 사는 함경도로 돌아갔다.
=================================
■ 내가 바느질쟁이… 침공(針工)하려고?
---------------------------------
8년 동안 형무소 안에서 배운 재봉기술로 양복집에 들어가 일을 하나 머릿속엔 늘 ‘틀어박혀 이 짓하려고 감옥살이 했나?’ 자문자답했다.
결국 1934년 10월 2일 밤, 함경남도 북청경찰서 신창주재소(新昌駐在所) 무기고 벽을 뚫고, 들어가 장총 여섯 자루(38식 기병총 5, 보병총 1), 실탄 700발(권총용 100발 포함)을 감쪽같이 훔쳐냈다.
===============================
■ 발칵 뒤집힌 북조선 함경도 늦가을
-------------------------------
1934년 10월 3일 아침. “모시모시…신창주재소입니다. 어젯밤 무기고를 털렸으므시다.” “뭐라고? 무기고를 털려? 바가야로(ばかやろう)…” 북청경찰서, 함경남도경찰국, 조선총독부가 발칵 뒤집혔다.
전국에 비상경계령이 내렸고, 이에 따라 일본 경찰대가 들이닥쳐 범인 있는 곳을 대라며, 온갖 행패를 다 부려 남녀노소 온 식구가 혼비백산 초죽음을 당했다.
===================================
■ 신출귀몰, 전광석화, 오리무중, 대담무쌍
-----------------------------------
1934년 10월 2일 거사이후, 1934년 10월 20일 잡히는 그 날까지 19일 동안 김춘배 체포에 20,000명이 나섰고, 이에 든 돈만 20,000원. 서울 발행 신문(동아·조선 등)은 호외(號外)에 이어 날마다 김춘배 무기탈취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다.
당시 김춘배 관련 기사 제목과 부제 등을 보면 △수수밭에 든 범인을 둘러싸고도 못 잡아 △얼굴 맞대고 검문했으나 총상을 입히고 달아남 △전후좌우 빠져나갈 틈 없는 산골짝을 지키는 여섯 명과 마주쳤으나 그냥 보낼 수밖에 △자경대원 코앞에 다가서서 내가 김춘배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요, 시키는 대로 여기 서있을 뿐이구만요 △그렇다면 저기 콩을 뽑아다 불에 구어라 등으로 기록됐다.
이처럼 김춘배는 용감무쌍한 지략가이자, 유격대원이었다.
================================
■ 연봉암(蓮峯庵) 주지 최응룡(崔應龍)
--------------------------------
1934년 10월 10일 밤. “주지님! 저 김춘배입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이 돈으로(12원 20전) 고약을 좀 사다 주시지요.” 신고하면 당장 잡혀간다. 진짜 큰 모험 대인들의 대화이다.
최응룡 주지는 약을 사들고 돌아온 은인. 당시 김춘배 범인(?)을 이처럼 아껴주는 뜨거운 동포애(同胞愛)가 있었다.
================================
■ 자금(資金)을 대시오.
--------------------------------
1934년 10월 4일 밤 열시 경, 김춘배는 북청군 양화면 후호리 어업조합에 나타나 “난 김춘배요. 자금이 필요합니다.”라고 하자 “열대(열쇠)를 유봉빈(劉鳳彬) 서기가 가지고 갔소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춘배는 “그럼 아내를 깨우시오.” 라고 다급히 당부하자, 부인을 앞세워 유봉빈 집에 갔다. 그리고 유봉빈을 데리고 나와 금고를 열게 한 뒤, 96원을 확보했다.
==============================
■ 9사1생, 탕탕탕 탕탕탕 탕탕탕
------------------------------
1934년 10월 13일 밤 2시경, 북청군(北靑郡) 거산면(居山面) 하세동(下細洞) 에서 가와구찌(江口:かわぐち) 경부보와 수사대원 다섯 명이 에워싸 다가서며, 기노시타(木下:きのした) 순사부장이 권총 ‘아홉 발’을 쏘아댄다. 독에 든 쥐.
죽을 지경∼ 쏜살같이 달아나던 김춘배가 탁 멈춰 뒤돌아서며 마주 쏜(대응 사격) 권총 탄알 세 발 중 두 발이 기노시타 어깨와 갈비뼈를 명중시켜 쓰러뜨렸고, 바로 번갯불처럼 번쩍 사라졌다.
==============================
■ 북청에서 벗어날 궁리
------------------------------
‘북청 여기를 벗어나 멀리 가려면 기차를 타야하지! 좋다. 도전이다.’ 자문자답. 이렇게 결심하고, 1934년 10월 10일 밤중 2시 경, 간이 의호역 플랫폼에 섰다.
정차 시간 1∼2분내 재빨리 몸을 실으면 성공이다. 이때 망을 보던 자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북청경찰서 김윤현(金允鉉. 40) 순사. 사세가 급박했다.
무기는 이런 때 쓰라는 것. 권총을 꺼내어 한 방을 쏘았다. 탄환은 그의 허벅지를 뚫었고(김 순사 곧 죽음/義湖驛の 兇行で 警官の 殉職-/당시 일본인 기록) 김춘배는 재빨리 솔밭에 뛰어들었다.
곧바로 경찰대원들이 도망치는 그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의사는 전광석화(電光石火), 비호(飛虎) 같아서 행방초차 알 길이 없었다.
==============================
■ 사건 나고 열아흐레
------------------------------
‘신창역에서 502열차에 몸을 싣기만 하면…’ 1934년 10월 20일 오전 7시 30분 경, 신창역(新昌驛)을 들려, 곧 김형로(金炯魯 37) 역장 관사에 들어가 ‘김춘배’라는 신분을 밝히며 담판을 벌였다.
첫째, 부인 아이들과 동행하게 하라. 둘째, 역장 복장을 갖추게 옷을 내놓아라. 셋째, 기차표와 현금을 마련하라. 여러 사람 목숨이 걸린 문제이다.
김형로 역장은 묘한 수가 없어 역에 함께 나가 원하는 대로 돈과 기차표를 챙겨 주었다.
두 사람은 마침 들어선 경성(서울)행 08시 44분 발 502호 열차에 몸을 실었다.
==============================
■ 하나님! 여기만 벗어나게 하소서
------------------------------
김형로 역장은 공인이다. 김춘배가 자기 아내를 데리고 기차에 탄 사실을 속후(俗厚)주재소에 알렸으며, 서원들은 재빨리 작전을 펼쳐 결국 8시 50분 열차 안에 들이닥친 여러 대원에게 실탄 든 두 자루 권총을 뺏겼다.
무기고를 털고 19일(만 17일 다섯 시간) 간의 사투는 이렇게 끝이 났다.
===============================
■ 취조 문서만 10,000장, 무기징역
-------------------------------
김춘배는 서류와 함께 1934년 11월 2일 함흥검사국에 넘겨졌다.
기록물만 10,000여 장, 죄명은 살인미수(2건), 강도(2건), 절도, 불법침입. 1934년 11월 26일 함흥지방법원 고메다(米田) 재판장은 고메하라(米原) 검사장 입회아래 구형대로 무기징역(無期懲役)을 언도했다.
이날 방청객이 무려 100여명. 판결에 따라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갔다.
1942년 7월 8일, 바깥 공기를 마시지 못하고 입감(入監) 8년 만에 옥사했다.
아들은 단하나 김종수(金鍾洙 1927년생)이고, 부인 전명숙(全明淑:1904. 3. 28∼1935. 10. 15)의 사망원인은 아무도 모른다.
고문 후유증? 비관 자결? 빈곤 아사? 하여간 애처로운 집안 이야기이다.
===================================
■ 마무리하며…‘반려 동물 사랑하는 만큼만’
-----------------------------------
밝은 세상에서 자유스럽게 형편대도 잘 사는 이웃들을 존경합니다. 여유 있어 동물 사랑하는 애정(愛情) 이해합니다.
이런 일 저런 사정을 보며 ‘사랑 많고 잘 사는 사람’일수록 애국지사에 대한 고마움 역시 풍성했으면 합니다.
좋은 자리에 있는 부자마다 ‘물마시며 근원을 생각하듯이(飮水思源:음수사원)’, 고문→철창→병신→죽음을 당한 애국지사를 생각했으면 합니다.
삼례는 어둡고 가난한 읍(邑) 아니며, 꿈을 가진 인물 많습니다. 앞이 가로막혀 희망 없는 완주가 아닐진대 고향 인심이나 도리로 김춘배 의사의 업적과 비참한 청춘 죽음을 잊어서는 아니 되지요.
남원 김주열 학생 3·15 부정선거 반대 데모에서 최루탄을 맞았으며, 전태일 봉제노동자(직공) 몸에 기름 부어 불에 탔습니다.
지성인들이 잊지 않습니다. 우리도 이런 일을 거울삼았으면 합니다.
지서나 파출소의 호출(글, 전화)도 두려운 것인데, 무기징역 끔직한 일입니다.
군민이 힘 한 번 모아보면 어떨까요? ‘으뜸 도시’의 꿈과 함께, ‘으뜸 마음(마을)’ 이를 들고 나설 때라 봅니다. 이 일을 차고 나설 인물 누구일까요?”
▲참고한 책과 자료
△독립운동가 김춘배(이승철 김경근)
△괴도[怪盜:일본인 카토(加藤伯嶺)/경성 동대문경찰서장)
△암야의 총소리(이원규)
△1934년도 국내 신문(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 김춘배(집필 중)
△ 김춘배 의사께 드리는 글(진행 중)
글쓴이 =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