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민 ‘한이불’ 잘 안다. 로 세상이 발칵 뒤집혀 ‘방콕 생활(방에 콕 박혀 살다)’을 하는 중인데, 문 앞에 이불이 있다며 아들이 들고 들어와 ‘남권희가 누구냐?’고 묻는다.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다시 묻는다. ‘발송인 남권희?’를 여자로 알고 두세 번을 물어 식구들이 한 바탕 웃었다. 남권희는 남자로 완주군 고산주민자치회장이다.
당장 전화하여 “신혼도 아닌데 웬 이불이냐?”고 묻자 그쪽 대답 “요새 나들이 어려우니 내외분 나란히 덮고 누워 편히 쉬시라고 보냈습니다.”. “에이 이 사람! 늙은이에게…?” 둘이 크게 웃었다. 살펴보니 질감-색깔-속에 넣은 내용물-겉을 싼 이불보 고가품이라 이불에 대하여 여러 생각이 났다.
△화산면 가양리 김○회는 장가들며 천은 남자가, 솜은 여자가 내어 이불 한 채 달랑 만들어 혼인했다. △1954년 2월 서울 올라간 구영서·강세형과 아무개는 군용 담요 한 장을 덮고 불 안 땐 맨바닥에서 잤다. △시골 사랑방 이불 때에 찌들어 냄새나고 검었다.
△‘밤이면 한 이불 덮고 잤다(夜寢同衾:야침동금)’ 이는 동문수학 친구 자랑이었고 △선인 시에 ‘한 이불 함께 하니 정의가 도탑도다(寢底同衾情荀篤:침저동금정순독)’ 아주 좋은 사이라는 뜻이다.
△고사에 “유하혜(柳下惠)는 이웃집 부인과 한 이불 덮고 자며 그날 밤 아무런 일이 없었다. △화재로 갈 데 없는 여인이 노나라 남자에게 한 이불 속에서 자자고 사정했으나 ‘난 유하혜가 아니라 유하혜처럼 그렇게는 못한다.’”며 거절했다.
△1980년대 까지도 광목에 풀 먹여 이불을 만들었으니 새 이불일수록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커 특히 신혼부부는 땀이 더 많이 났다. △흥부 내외는 이불 하나에 아들은 열두 명 ‘발이 울타리 밖에 나와 있었다.’고 한다.
△비단금침(緋緞衾枕) 깔아 놓고 주안상 차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남편이 많았다. △뇌물 한창 심하던 시절 돈 주체를 못하여 이불 솜 사이에 숨겨두고 출근하면 혹 도둑이 이불 들고 가지 안했나 이 걱정에 생병 난 공직자가 있었다.
△겨울 빨래를 할 때 갈아입을 옷이 없어 이불 둘러쓰고 있었던 그 남자의 이름을 대면 거의 알 것이며 △고산에 옥천여관(玉川旅館)·만월여관(滿月旅館)이 있어 한 이불 덮었던 시절이 있었다.
△예전 전주 전일여중학교 송순규 선생은 동서·조카·시아주버니 온다며 새 이불을 산다기에 귀찮지 않느냐고 물으니 “왜 귀찮아요? 살 돈 있어 좋기만 해요” 1등 며느리였다.
“남권희 님! 여자로 알았던 식구들 오해가 풀렸으니, 언제 한 번 오셔서 이불 함께 덮고 이야기하면 어떨까요?” 지금 이불은 부드럽고 따뜻하니 집집마다 반가운 소식 있기를 바란다. 칼럼 계속 잘 쓰라는 방법도 열두 가지이구나!
/이승철=칼럼니스트/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