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 어느 날 좁은 비탈길을 걷는데 난데없이 호랑이도 무서워한다는 가을 소나기가 내린다. 체면상 뛸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비 맞기도 난감할 때 마침 인기척이 나 빗겨 서려는 순간 얼른 우산을 건네주고 쏜살같이 달려가는 남자가 있었다. 한 100m 조심스레 다가가니 처마 밑에 여러 학생이 비를 피해 서있는데 우산 임자는 알 길이 없다. 그 때 한 남학생이 아무런 말이 없이 우산을 받아갔고, 나 또한 수줍어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못한 채 잊혀 지지 않는 40년을 보냈다.”
이 말을 마친 능소화에게 ‘여자도 그러느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한다.
1957년 겨울 일심사(一心舍) 심부름으로 돈을 받으러 이리에 오니 춘포면 봄개를 찾아가란다. 익산교에서 하차하니 한 학생이 따라 내린다.
같은 방향 둑길로 한 1km, 남녀유별이라 말 한 마디 없이 몇 걸음 앞서서 가다가 용기를 내어 “김 아무개 선생을 뵈려 가는 첫 길인데 그 집을 좀 알려 달라.”고 청했다.
여학생의 키나 걸음 거리, 대답하는 자세, 청아한 그 인상… 지난 60년 아직도 눈에 선하며 그는 이리여고 ○아무개 양 이었다.
이리여중과 이리여고가 나란히 있어 ○아무개 닮은 여학생을 6년 동안 날마다 바라보며 살았다. ○아무개 양 건강해 혹 이 글을 보아도 이런 기억 전혀 없을 것이다.
1979년 12월 26일 전 근무지의 손○정 꽃집 아가씨가 찾아왔다. 단칸방 잘 데가 없어 나는 외딴집 광산 막사 임춘섭 자취방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추운 아침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이 찾아왔다. 아내가 해산 직전 몸부림을 치는 가운데 내가 애를 받았고, 이웃집 허옥규 어머니가 삼을 갈랐다. 어제 온 손님은 덜덜 떨다 돌아갔다. 꼭 50년 전 이야기이다.
그 후 전화 한통 없이 오늘에 이른다. 무관심? 몰인정? 남녀유별 덜 된 남자의 소극성 때문이냐? 이젠 자동차도 없고 혹 만난다 해도 80대들이다. 너무 늦었다. 지팡이 짚고 만나 무슨 교감이 있겠나. 2019년 연말 달력처럼 나도 물러갈 나이다.
○○대학교에서 재실 현판 하나 번역에 27만이란다. 20페이지 원고 쓰고, 사진 준비, 자료 찾기, 편집, 교정 그 사례비가 ○○만원. 이쯤 되면 아내 얼마나 힘들게 했을까 쉬 짐작 가는 얘기이다.
식구 고생시킨 사람 1호를 찾는다면 나도 그 후보군에 들 것이다. 가족에게 하는 말 “나 죽어 문상 오면 실수투성이 그 흉이나 보라”고 한다.
‘동행자에 빠져 시장거리 아내를 몰라보더라고…’ 나의 소원은 순서대로 가는 것이다. IQ보다 중요한 게 실행력이라는데, 보은의 만남이 포기되는구나. 샤워 마치고 나서가 가장 잘 생겨 보인다는데 안방 친구도 백발이다.
시대를 넘어 이어지는 갈등을 축구공처럼 차버리고 둥근 세상을 만들어 나가자. 오늘도 나는 나를 괴롭힌다.
/이승철=칼럼니스트/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