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2일(소설) ‘화양산(華陽山) 황단(皇壇) 100주년 기념학술대회’에 갔다.
전주에서 진안까지 가깝지 않으나 초청자와 동행자의 배려가 커서 즐거운 한나절이 되었다.
이란 주제 좋았고, 나눠준 책자(110p) 역시 공들여 훌륭하다.
펼쳐 본 50페이지 사진 한 장. 나뭇가지에 이불보만한 차일을 치고 진설해 놓은 제사상 그 앞에 손을 맞잡고 홀로 앉아 있는 소복한 40대 여인의 처연(悽然)한 모습을 보자 눈물이 핑 돈다.
‘며느리 김영기(1951-1953)!, 모두 피난가고 혼자 제사 지내고 있다’ 이게 설명문이다. 당시 운장산 일대의 상황이 이랬다.
“동상면 명지목은 1951년 가을까지 전북도당 ‘북부지도부’ 거점으로 해방구입니다. 북부지도부 호위임무를 내가 있던 번개병단이 맡았지요.”, “6개 도당회의 뒤 군사개편이 있었는데 충북은 68사단, ‘전북북부는 45사단’으로 편성하고, 45사단 사단장에 황학수(황의지, 적에게 투항), 참모장 길병래(자수하여 보아라부대 토벌대장으로 있었음), 내가 작전참모로 있었습니다. 45사단이 망가진 후에 남은 병력으로 복수연대를 조직했다고 들었습니다.(임방규 말)”
이런 전시였음에도 궐사할 수 없다며 나선 김영기 며느리! 위험 지역이라 ‘남자는 아니 되니 내가 나서리다.’ 당찬 이 신념으로 화양산에 올랐다.
가통을 잇은 이 자부의 효성과 옥황상제(하나님, 한울님, 하느님)를 믿는 신실한 마음이 절절했기에 오늘이 있다고 본다.
철저한 신앙심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딸이었더라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여장부의 이런 집념이 대를 이어 금년 ‘황단대제(大祭) 100주년’이다.
수당(守堂) 이덕응(李德應) 선생이 1919년부터 해마다 팔월 그믐날 천(天)-지(地)-인(人)에 올리는 제사이다.
학술대회장에서의 발표내용으로 보아 앞으로 △이덕응 선생의 재조명과 △황단대재 유지발전 두 축(二軸)이 과제로 보인다.
▲초상화에 대한 화법 평가는 남들에겐 몰라도 가족 앞에선 삼가 해야 옳았다. 예수 성화를 보며 옷-고개-자세-십자가 어쩌구저쩌구 이런 말이 없다. 창으로 찔리며 못 박힌 참상으로만 느낀다.
이덕응 선생의 ①높은 학덕 ②도학적인 정신세계 ③많은 사람의 교유(敎諭) 이 세 가지를 외워두고 자기 실력대로 파고드는 게 후학의 도리이다.
소상(小祥)-대상(大祥) 없어졌으며, 기제사(忌祭祀)도 달라지고, 어르신들이 묘 앞에서 올리던 시제를 재각에서 합사로 간단히 끝내버려 기본정신이 사그라지고 형식으로만 때워지는 이 때 제수를 장만, 산에 올라가 행하는 천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해야 선인에 대한 지성인들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손희창·이부용 외 가족들의 조마조마 마음이 덜어지기 바란다.
/이승철=칼럼니스트/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