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 가게 있어 장사하면 농사 100마지기 소득보다 낫다던 시절의 가 고산 읍내리에 있나.
노포란 ‘대대로 전해 오는 오래된 점포’를 말한다. 고산성당에서 축구장 가까이까지 넓은 길 양편에 전부터 내려오는 ‘노포’ 귀하다. 왜 이럴까? 지역사(史) 연구자나 점주 후손들은 이 까닭을 밝혀내야 한다.
△사농공상(士農工商) 계급에 묶여 장사를 천시했기 때문인가? △전주에서 시내버스 읍내까지 오면 장사 안 된다고 외치던 상인들의 패기가 꺾였단 말인가? △당대 돈 많이 벌어 장사에 신물이 났단 말이냐?
분명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장사엔 요령이 필요하고 친절해야 사람 찾아들어 성공한다.
하여간 가장 오래 이어오는 점포는 유유식 씨 사료점포로 보인다. 1960년 전후 쌀가게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가양 난포 김재우 씨가 미곡상을 드나들다 사위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고산 상인들 5일 장날 사람 북적일 적엔 손님 눈치 볼 것 없이 부르는 게 값이었다. 거리의 양편엔 잡화상-그릇점-쌀집-물감집-양약방-옷감가게-대장간-자전거포-술집-중국요리-국수-책방-방앗간-옹기전-과일점-제재소-라디오방-고기집-사진관-이발소-미장원-털실가게-양장점-주조장 등이 있어 고산을 우지좌지 했는데 2대 이어지는 집 뉘 집일까? 없다. 이게 고산의 약점이다.
음식점 군산옥은 여인을 고용하니 젊은 술꾼 표 나게 많이 모였고, 일하는 여자를 ‘고용자(雇傭者)’라 불렀는데, 실은 ‘삯 받고 일하는 사람’이란 뜻이나, 손님 잔에 술 따르는 경우도 더러 있어 하세 받는 여인 축에 들었으나 지금으론 아르바이트이었건만 그 땐 인권이 마구 짓밟히던 용어였다.
맨발집 내외는 인상 좋으며 부지런해 돈깨나 벌었다. 김정자-김석탁-유홍식 양약방은 당시 고산 5개면 의료를 맡았다고 봐야한다. 환자 이야기만 듣고 생각나는 대로 알약을 갈아 섞어 종이에 싸 주었으니 좋고 나쁘고 그 약 성분 아는 사람 하나 없었다.
낫, 도끼, 호미, 괭이 오래 쓰면 끝이 무뎌져 철공소(대장간)에 가 벼리어 썼다. 사진사 양민증(良民證)·도민증(道民證) 사진 찍어 재미 봤고, 특히 명절 때면 시골 처녀들이 떼 뭉쳐 나와 합사진(合寫眞)을 찍었다. 그래서 사진 찍냐? 박냐? 우수개소리가 있었다.
조중철 씨 물감가게 잘 되었다. 청색 물감 사다 풀어 잉크 만들어 썼고, 광목에 검정 물들여 옷을 해 입었다. 뭐니 뭐니 해도 막걸리 집에 사람 끌었고 지금 술 풍속과는 엄청나게 다른 세계이었다.
상인은 언제나 손님을 친절하게 맞아야 2∼3대 이어가니 어쨌든 고객의 맘을 사로잡아야 한다. 57년 노포 역사를 지닌 구일상회(두정자) 대접 받아야 한다. 지금 고산 읍내 친절성 제1호는 뉘 집일까? 뉘 집일까?
/이승철=칼럼니스트/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