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는 구(舊) 고산교(高山橋) 근처를 가리킨다. 동상면과 화산·경천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쳐지기에 ‘두 물머리’, ‘삼태극 지역’이라 하며, 이런 곳은 사람들이 너그럽고 온후해 인심이 좋다.
종리 신암(愼菴) 김정만(金正萬) 선생 서당에서 효경·소학(孝經·小學)을 배울 때나 성경을 보면서 ‘책 속에 이런 사람 닮은 이가 누구일까?’ 이런 잣대로 살피는 동안 차차 흥미가 더해졌다.
▲1950년 7∼8월 본인은 고산면장이요, 아들이 현역 국회의원인데 세상이 뒤집히자 분주소에 끌려갔다. 누가 봐도 피할 수 없는 인물 박건호 씨이다. 이에 앞서 신종갑 씨는 면장도, 아들이 국회의원도 아니나 피살됐다. 이 판국에 박건호 씨의 구금은 무엇을 의미하나 짐작이 가는 시대이었다. 대책회의가 열려 찬반 비율 49:51 죽느냐 사느냐 반반 목숨이 걸린 자리이다. 침묵과 치열한 토론이 진행됐고 결국 풀려났다.
▲6?25 전쟁 중 고산읍내가 빨치산 습격을 일곱 차례나 받아 집이 불타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치안대는 ‘전북북부지도부’ 소탕 작전에 나섰고, 이 전투에서 이○준을 붙잡았는데 이 자는 팔팔한 북한 정규군으로 피해자 측에서 보면 처단 1호 대상자이며, 본인도 살 생각을 못하던 전시이었다. 읍내에서 처리문제를 두고 회의가 열렸을 때 “여러분! 이 자 밉기야 하지만 고향에 부모형제가 있습니다.” 회원들은 별 말 없이 살려서 장가까지 들였다.
▲와룡리 김재월은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지리산 작전까지 하였고, 6·25 한국전쟁 중 패잔병이 돼 집에 왔다. 불안한 나날…인민공화국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도중 미군기 공습을 받아 대열이 흩어졌고, 얼마 후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다 국군에 발각되었다. ‘넌 죽어 마땅하다’며 총을 가슴에 겨누자 “난 국군 장병입니다.”. “그를 어찌 믿노?”라는 물음에 허리띠 안쪽에 감춰둔 태극기 배지를 보였다. “그럼 어느 부대였나?”, “○○부대였습니다.”, “그래? 조재미(趙在美) 장군을 아는가?”, “압니다.” 얼마 후 조재미 장군 앞에 섰다. “야! 너 안 죽고 살았구나!” 껴안았으며, 바로 군복으로 갈아입혀 함께 전선을 따라 내려갔다. 이분들은 내가 보았던 논어·성서 속 사람들과 같다.
삼태극 두 물머리는 1935년 이전까지 삼기면 땅이었다. ▲완주문화원장을 지낸 구영철은 1950년대 초 서울에 올라가 동북고등학교에 다니는데, 고향에서 안다며 줄줄이 찾아온다. 뿌리치지를 못해 밥 나눠 먹었으며, 곧 지낼 방책을 마련해 주었다. 오메 출신 대단한 인물이다.
▲계성학교 유춘경 선생 부인은 임신한 몸으로 전주에서 어우리까지 걸어왔다. 차비를 아끼려고…. 아이 낳아 편안히 살 곳이 바로 삼태극 두 물머리이다. 남을 돌보면 100배로 받는데 이는 하늘의 이치로 확실하다.
/이승철=칼럼니스트/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