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남문 ▲지정종목:보물 ▲지정번호:제3008호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있는 곳: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2가 83-4 ▲시대:조선 ▲종류 분류:남문 ▲크기:1층 정면3칸, 측면3칸/ 2층 정면3칸, 측면1칸 ▲기사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전주풍남문.
이렇게 설명하지 않아도 시민, 관광객, 학자, 언론인 다 아는 이야기이다. 굳이 한마디 하는 이유는 이기환 선임기자의 글 「헐린 돈의문, 살아남은 숭례문…일제 시커먼 속내가 숨어있다.(2019. 8. 22)」에 ‘풍남문’ 얘기도 나온다.
알다시피 전주는 성벽 없이 문만 한 채 달랑 남아있고, 성벽은 사람 손으로 헐어냈다. 이유는 도시계획과 길을 넓힌다는 명분. 그런데 일제 왜 풍남문은 남겼을까?
△전주사람 구경하라고? △조선 6대도시 전주 남문이니? △전주최씨 최유경이 성벽 쌓으며 낸 문이라서?
이게 아니었다. 정유재란 때(1597) “왜장 시마즈 유시히로(島津義弘:도진의홍)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등가명)가 돌파한 곳”이라는 이유로 남겼다고 한다. 여기 시마즈 유시히로는 전주에 들어와 온통 불 지르고 닥치는 대로 부수었다(…義弘等入全州焚蕩毁…의홍등입전주분탕훼…).
『조선세기(朝鮮世紀)』를 보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가 함양을 거처, 운봉을 함락하고, 장수·진안을 지나 전주를 경유한바 ‘남긴 건 하나도 없었었다(無不殘滅:무부잔멸)’.
결국 양정포(良正浦:용진읍 양전)에서 회의를 열고 세 방향으로 나뉘어 나갔는데, 시마즈 유시히로(島津義弘)는 순창·담양 쪽 7개 열읍(列邑)을 지나며 ‘만나는 사람 코를 베었고(逢人則割卑)’, ‘집은 닥치는 대로 불 사랐다(遇家則放火:우가즉방화)’.
전쟁에서 못 믿을 건 외국군이다. 가토 요시아키가 전주에 들이닥치던 날 명나라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가토는 큰소리치며 풍남문을 밀치고 들어선 것이다.
정유재란은 약 320년 전의 일. 그런데도 한 병장이 ‘점령할 때 들어선 문이라’며 부수지 않았고, 그들의 입장에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겨 남겨둔 것이란다.
‘역사를 잊으면 나라를 잃는 것’이라 설파한 학자가 있지만, 우리들은 좀 생각과 인식이 모자라는 데가 많아 문제이다.
어느 군청 담당자를 만나 ‘조선시대 군(현)청 자리에 안내판을 세우자’하니 “땅 위에 아무런 흔적이 없어 어렵다.”고 한다. 이런 규정이나 제도가 있다면 관계자는 얼른 뜯어고쳐야 한다. 유범수 전 완주군수는 지금까지도 ‘다리 군수’라는 멋진 이름을 남겼다. 이처럼 명성을 남겨야 좋은 인물로 기억된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 생각을 바꿔 단순한 삶도 칭찬하면서, 꿀 빵처럼 달콤하게 사람 대할 순 없는가. 선출직 인물과 참모들은 역사에 밝을수록 좋다.
/이승철=칼럼니스트/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회 운영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