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낙 높아 몇 m라 적시하지 못해 미안하나 우선 ‘최초 교리당’이라는 데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 표지석은 이서면 남계리 초남마을에 있으며 비록 천주교도가 아니더라도 초남리를 모르는 사람이 적다. 세상에서 생명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으랴. 애국자 안중근, 유학자 송시열, 세조조에서 사육신이 처형당했으며 십자가 예수도 마찬가지이다. 이 마을 동정부부 이야기가 애처롭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흔히 이순이가 동정생활을 결심한 게 성체를 받아 모신 후 하느님과 일체가 된 ‘자기 몸에 맞게 살고자 동정생활을 결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옥중 편지’를 보면 이미 어려서부터 동정생활을 결심했다. 이순이와 유중철은 1798년 9월 시부(아버지)인 유항검과 신 앞에서 동정 서약을 마치고 한 얘기에 ‘어려서부터 바라던 소망이 이뤄졌다’고 말하였다.”. “우리의 만남은 두 사람의 소원을 주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이기에 저희 둘이 주님께 감사하는 길은 죽음으로써(순교) 신앙을 지켜 주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비석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자료가 더 확신을 준다. 치명자산에는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과 유중철, 이순이 등 7인 가족묘지가 있고 벽에는 옥중 편지를 확대해 걸어두었다. 여기 글을 보고 남계리를 찾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나올수록 반가운 일이다. 유항검이 살던 터 남계리 현장의 안채 건물은 제7대(1967∼1971) 국회의원을 지낸 유범수(柳凡秀) 생시 집이다. 유항검과 유범수는 한 터의 큰 인물임으로 더욱 신묘하다. 유범수 의원이 재임 때 살던 마당에는 역적의 터라며 파헤쳤던 못을 재현해 놓았고, 순례자마다 ‘겟세마네 동산’ 예수의 고난 과정을 묘사해 둔 시설물마다에 간절히 묵도한다. 남계리는 대부분 평지로 전북혁신도시가 가까워 땅 값이 높다. 자연부락으로는 대농(大農/쇠평이/金坪里), 초남(草南/초내미/初南里), 신기(新基/새터)가 있다. 대농의 다른 이름 는 전에 사금이 많이 나와 붙여진 이름이란다. 초남은 남계리의 으뜸 마을이며, 신기는 초남리 북쪽에 새로 생긴 동네이다. 김제시 용지면이 가까워 1994년 경계 조정이 있던 곳이다. 는 바위와 관련이 있고, 물고기마을 반교리도 이웃이다. 이서면은 면으로 민원이 있어 군청에 가고, 선거구가 같아 완주이지 생활은 완주와 남남이나 다름없다. 운주면 대둔산과 남계리는 50여km, 이서면 모르는 운주면민이 많고, 양쪽 주민은 유독 완주에 대한 소속감이 낮은 편, 이웃사촌이라는 어감이 자꾸 멀어진다. 자주 만나야 정과 마음이 쏠린다는데… /이승철=칼럼니스트/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한국국학진흥원 자문위원회 운영위원
최종편집: 2025-06-24 13: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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