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초·중교 학생들의 장래 희망은 ‘대통령·대장’이었고, 어른들 만나면 ‘Y당’의 정치이야기 뿐, 신문을 펼쳐도 정치면에 눈이 먼저 가 이래서 거의 정치인이랄 수 있었기에 이 고장 정치인을 소개한다.
▲3∼4대 이존화(1914. 4. 26~1964. 8. 10) 민의원은 ▲완주군 비봉면 이전리 구상 홀아버지 손에서 자랐기에 당선되자 여러 사람이 대리만족을 느꼈다. ▲자유당 덕도 있었지만 개인 인기가 대단해 옥중에서 출마 487표 차로 낙선했다.
▲의원하는 동안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는 평판이 있었다. 무얼 부탁하면 ‘그럽시다’ 약속이 없고, 자기가 성사시키고도 ‘제가 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지 않는 군자이었다.
당선 후 서울 올라가 사직동 어느 집 모방에서 혼자 지냈고, 병이 나자 서울대학병원이 아니라 경찰병원, 성모병원에 입원, 삼종 증손부 이재규 처 김명례가 외상장을 보아다 밥 짓고 약 수발을 했다.
풍남동 오목대 아래 셋방에서 당선되자 ‘이존화 혹 돈이 생긴다 해도 감출 데가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며, 50에 죽을 때까지 집 한 채, 땅 한 평, 자기 이름으로 등기된 게 없어 유기정 의원이 주선을 하고 국승선이 앞장서서 마을 앞에 ‘청렴추모비’를 세웠다.
한국사람 못살면 만주로 갔고 이존화도 압록강을 건넜다. 해방 후 고향에 돌아와 할 일이 없으니 정치활동. 이재규, 유윤상, 손일동, 이문구, 오인봉, 윤상익, 안석태, 김용희, 김재옥… 젊은이가 줄줄이 따랐으며 병역, 노무자, 취직문제를 들고 찾아오면 별 말 없이 받아들였다.
소통의 명수로 전주 경기여관이나 은행여관 마당엔 사람이 가득했다. 긴한 일로 오는 사람도 있지만 얼굴 보러 가는 지인이 많았다.
△만주봉천학원 전문부법과졸업 △봉천한교보호단장 △독립촉성국민회 완주군지부장 △자유당 완주군당 위원장 △자유당 전북도당 선전부장 △북진통일전북연맹 부위원장 △전주시소방단장 △자유당 중앙당조직부장 △국회 문교분과위원장을 역임했다.
국치호 전 교사는 장수 근무 어려움을 말해 수선국민학교로 이동됐다고 스스럼없이 얘기한다. 어린 시절 숯 통개를 지고 누운기러기재를 넘었으며, 초등학교를 나와 비봉면서기를 하다 만주로 건너갔다.
자유당은 사라졌어도 정치 얘기는 남았으며, 사람은 갔어도 업적은 살아있다. 삼례역에 급행열차를 멈추게 했고, 봉동초등학교 교사 여러 칸을 지어 공적비기 마당에 있다.
정치는 사람 마음에 감동을 줘야한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안녕하세요.’ 이걸로는 표가 절대 오지 않는다.
이존화는 완주 정치계의 스승이다. 표 눈이 멀어 오는 건 아니다. 백촌(白村) 이존화 전 의원은 현대 정치사에서 연구 대상자이기에 정치에 꿈이 있으면 발을 벗고 나서야 성공한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