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언(金昌彦:1873∼1942) 둘째 아들이 김춘배(金春培:1909∼1946). 1934년 10월 2일 함경남도 신창(新昌)주재소 격납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19일 동안 함경남도를 누비며 일본 순사 부장에게 총을 쏘는 등 우리 고장 제1등 애국 독립투사였다. 1927년(18살) 2월 만주 돈화현(敦化縣)에서 이청천 장군 정의부군(正義府軍)에 가담, 일본 영사관을 습격해 간도를 뒤집어 놓았는데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일본 경찰의 협박에 못 견뎌 자수했다. 이 일로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탈옥을 해 죄가 가중되어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8년 간 옥살이를 했다. 김춘배는 1934년 4월 출감, 일곱 달 뒤 신창주재소 무기고를 뚫어 장총 6정, 권총 2정, 실탄 800발을 탈취했고, 북청(北靑)어업조합을 습격해 군자금 90원을 손에 쥐었으며, 3만원을 마련하려고 나선 삼례 고향 길 기차 안에서 붙잡히기까지 19일 동안 동원된 체포 인력이 2만명이었다(1934.10.24 호외).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무기수’ 김춘배가 해방을 맞아 풀려났으나 1946년 12월 1일 고문의 후유증으로 길거리에서 숨을 거둬 서울공동묘지에 묻혔다는데 그 묘를 모른다. 같은 삼례 사람 양칠성(梁七星)은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추대되어 대접을 받는다. 교육수준이 인도네시아보다 높은 완주나 삼례는 김춘배 이름 석 자도 기억해 주지 않으니 애국지사의 영령이나 온 나라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원통해 한다. 우선 완주기독교계와 교육계가 관심을 가져야한다. 김춘배 아버지 김창언 집사는 1907년 가을 사랑방에서 사숙 영흥학교(永興學校:1909년 교명 ‘영신’으로 바꿈)를 열어 재무를 맡았고 이 학교가 삼례중앙초등학교 아닌가? 건물을 짓고 인구 늘리는 으뜸도시 건설을 하면서 애국지사를 잊거나 군민의 정체성을 외면한다면 웃음거리가 된다. 군민의 단결이란 ‘공동목적을 가지고 힘을 합치는 것’이다. 의병사나 전북독립운동사를 쓰는 학자들이 왜 김춘배를 빠뜨리나. 1934년 10월 호외를 펼쳐보기 바란다. 아무리 민주국가라지만 경찰서나 검찰청 출두가 유쾌한가. 김춘배의 체포-취조-재판-복역-객사 과정을 상상해 보자. 사람을 볼 줄 알아야 인재가 모인다. 정치인이 갖출 덕목이다. 김춘배 부친과 백부 이야기는 삼례제일교회 당회록에 가득하다. “1918년 2월 24일 본 교회 김계홍(金桂弘) 장로 5형제 권속 30여인과, 이창옥(李昌玉)집사, 반기춘(潘基春)·박대필(朴大必) 씨 등 전 가족 50여인이 중국 동북지방 길림성(吉林省) 연길현(延吉縣)으로 이거케 되니 교회가 거의 떠난 셈 그중 입교인(入敎人)만 29인인고로 교회는 영산(零散)한 중이다” 『삼례제일교회역사』 열다섯 번째 글 ‘이민편’ 기록이다. 김계홍(1869∼1942)동생이 김창언. 김창언 아들이 춘배. 김춘배가 바로 삼례 사람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
최종편집: 2025-08-10 13: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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