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산’ 덩치 크고 아름다워 찾는 사람 많다. 산이 높고 넓기에 한두 번 등산으로는 다 알기 어려워 몇 가지 소개를 하나 산 소개 어려운 줄을 안다. 금강산 다녀온 분마다 관산평(觀山評)이 다르다. 용문골을 다녀간 산악인과 혹 의견이 다를지라도 『신택리지(新擇里志)』라 여기고 보완해 나가기 바란다. 이는 대둔산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노적봉(露積峰)’이 있다. 힘이야 들겠지만 해마다 짚을 엮어 이엉을 했으면 한다. △용의 입이 있다. 용과 연관이 있어 ‘용문(龍門)골’이라니 용 입을 원형 그대로 두어야 한다. 자연은 복원이 어려우니 ‘뉘 손이 망쳤다.’ 이 소리 절대 듣지 말아야 한다. △처녀 폭포가 있다. 보기에 따라 다르지만 예쁜 처녀가 비단치마를 살짝 올리고 시원하게 오줌 누는 모습이다. △여기 살던(사는) 용은 분명히 백룡(白龍). 황톳물이 흐르면 황룡일터인데 하얀 비단 폭을 펼쳐 놓은 듯한 물줄기의 흐름이 마치 움직이는 용으로 보인다. △동생 바위가 있다. 형 바위는 ‘당마당’ 건너편으로 옮겨져 그 이름이 배바위[舟岩:주암]. 아우만 여기 남아 있다. △밥상 바위도 있다. 용의 딸이 천하장사 배서방(裵書房)에게 대접했던 자리이다. △파수봉(把守峰)이 있다. 임진왜란 배재싸움(이치전투:梨峙戰鬪)에서 망을 보던 봉우리이다. △높은 곳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약수(藥水), 특히 갱년기 여인들에게 특효가 있어 이 물만 마시면 갱년기를 모르고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명수(明水)이다. △역사가 서려있는 골짜기다. 전쟁터에 장수 있고 군수물자 공급하는 사령부가 있기 마련인데 이 골짜기가 ‘용문골’ 바로 그런 곳이었다. △전투원이 든 수천 개 용기(龍旗)가 펄럭이던 골짜기이었기에 용문(龍門)골이다. △옛날부터 불러오는 칠성봉 여전하며, 특히 정관(貞觀) 12년(서기638) 즉 백제 무왕 39년 안내판이 있다. 그렇다면 2018년을 기준으로 1,380년 전 이야기이다. △보이는 석성(石城) 임진왜란 때 쌓은 성이라 할 경우 전문가의 고증이 있어야 하지만, 하여간 이 석성 절대 헐어내선 아니 된다. 교각살우(矯角殺牛:소뿔 고치려다 소죽임)란 말이 있다. 자연을 원상대로 보존 한답시고 여러 의미를 지닌 유적에 함부로 손대면 이 자체가 훼손이기에 진짜 산악인과 학자들이 관심을 가져야한다. △운제(雲梯)가 관향인 배 서방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룬다. △문전성시(門前成市)에 이런 ‘문전성시(門前城屍)’도 있다. “죽은 시체가 성처럼 쌓였다.”는 뜻이다. 이치전투의 참혹상이 담겨 있는 골짜기이니 역사 아무리 어려워도 이런 사실만은 알고 대둔산에 올라야 진지한 산 맛을 제대로 느낀다. 대둔산 처음 개척 당시 물 없어 걱정이라던 이 우려가 50년 만에 싹 가셨다. 돌무덤은 뉘 묘일까? 완주군청 공무원 유원옥·이도일 씨가 눈을 띄워주었다. 황포 의병장 전선에서 병이 나 숨 거둔 골이 여기라면 더 숙연하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
최종편집: 2025-06-24 13:4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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