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삼례문화예술촌을 찾는 방문객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
봄이 왔기 때문만은 아니다. 예전과 다르게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많이 늘어났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입소문을 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지난 3일 삼례문화예술촌이 개관 5년 만에 새 단장을 마치고 재개관했다.
모모미술관, 디지털아트관, 씨어터 애니, 커뮤니티 공간 뭉치, 문화카페 뜰애 등 이전에 없던 문화공간들이 들어섰다.
발전을 위해 과감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판단, 삼례문화예술촌에 메스를 든 두 사람.
바로 완주 고산 쌍둥이 자매 아트네트웍스(주) 심가희·심가희(59) 공동 대표를 만나, 살아온 이야기부터 삼례문화예술촌을 운영하게 된 배경 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 달라진 예술촌
지난 해 말 공모을 통해 삼례문화예술촌의 운영자가 아트네트웍스 주식회사로 바뀌었다.
아트네트웍스(주) 심가희·심가영 공동대표는 40년 넘게 독일, 중국, 일본 등 세계 100여국 200여개 도시를 돌며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등 한류의 선도적 역할을 했다.
수많은 해외공연의 경험과 노하우를 고향에 꽃 피우고자 두 공동대표는 삼례문화예술촌 공모에 참여했고, 선정과 동시에 삼례문화예술촌 밑그림을 새로 그리고 리모델링을 단행했다.
삼례문화예술촌은 전북 지역작가 중심의 전시를 열게 될 모모미술관, 미디어 활용 작품전시 및 AR(증강현실)·VR(가상현실)체험이 가능한 디지털아트관, 극장으로서 면모를 갖추고 본격적인 예술공연 및 영화상영이 가능한 씨어터 애니 등의 문화공간이 새로 문을 열었다.
또한 지역주민들에게 교육, 체험 및 여가 활동의 공간을 제공할 커뮤니티 뭉치, 커피를 마시며 작품 전시, 재즈를 비롯 첼로, 피아노 등의 음악회를 감상할 수 있는 문화카페 뜰애도 리모델링으로 태어난 공간이다.
■ 개관 준비 과정
지난해 12월 삼례문화예술촌 운영자로 최종 선정됐다. 3월 3일을 개관날짜로 잡고, 공사를 시작했다.
정상적으로 5~6개월이 소요돼야 하나 지역주민들에게 달라진 예술촌의 모습을 빨리 보여주고자 2개월로 수정했다.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는 한 겨울 날씨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밤을 새면서 공사를 강행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볼멘소리 없었다.
“수십 년 동안 한 팀으로 인연을 맺고, 해외 공연을 다녔으니, 가족이나 다름없죠. 삼례로 가자고 했을 때도 반대하는 사람 없었어요.”
단기간에 공사를 성공적으로 잘 끝마칠 수 있던 이유, 바로 ‘팀워크’다.
모든 리모델링 공사를 마치고, 드디어 3월 3일 재개관했다. 다시 문을 열던 날, 사람들은 달라진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채워진 작품에 놀라고, 평소 볼 수 없었던 궁중의상쇼, 비보이, 태권도, 클래식 등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개관식 프로그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 세 살 때 한국무용 시작
쌍둥이 자매 심가영·심가희 대표의 고향은 고산면 동봉마을. 고산자연휴양림 인근 마을이란다.
언니는 가영, 동생는 가희. 쌍둥이였지만 언니 가영씨는 조용히 독서를 좋아했고, 동생 가희씨는 음악이 나오면 몸이 반응할 정도로 춤을 좋아했다.
3살 때 금파무용학원에 다니게 되면서 한량춤의 대가이자 전북무형문화재 제17호 故 금파 김조균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된다.
쌍둥이다보니 자연스럽게 동생 따라 춤을 추게 됐다는 심가영 대표.
어째든 금파 선생님을 만나 두 사람은 국가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이수자라는 영예를 얻었다.
■ 강선영 선생 만나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이사 가야만 했던 아픈 기억도 있지만, 공부는 계속 이어갔고, 금파 수료증을 받게 되는 기쁨도 얻었다.
또한 국립무용단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 해방 후 전통춤의 마지막 1세대로 꼽히는 故 강선영 선생(중요 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 명예보유자)을 만나, 춤의 깊이를 더하게 된다.
“국립극장에서 국립무용단의 ‘열두무녀도’라는 선생님의 작품을 보고 반해서 저희가 찾아가게 됐죠. 열일곱 살쯤 됐을 거예요.” 심가영 대표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 해외공연, 큰 무대로
강선영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두 자매는 1979년 강선영무용단 창립과 동시에 해외공연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하게 된다.
세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춤을 시작한데다, 한국 전통 무용의 두 고수를 만난 덕분에 해외공연 시 단장이라는 묵직한 역할을 맡겼다.
“강선영 선생님 밑에서 20년쯤 일했던 것 같아요. 그 분과 함께 호주, 캐나다, 일본, 미국, 중국 등 여러 나라 엑스포에 참여했습니다.”
강선영 무용단 이름으로 해외공연을 다니다 지난 1990년 심가영·심가희 개인발표회를 시작으로 자립하게 된다.
그해 3월 심가희 금림예술단을 창단, 20년 동안 활동했다.
오디션을 통해 뽑은 단원이 처음에는 20명이었으나 60명으로 늘어났고, 2년 전에는 규모가 더욱 커져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인 아트네트웍스(주)를 설립하게 됐다.
■ 심가희 금림예술단 설립
1991년 미국 LA 박람회가 심가희 금림예술단 이름의 단독 해외 첫 공연으로 기록된다.
이를 시작으로, 몽골, 중국, 스페인, 캐나다, 모스크바, 뉴질랜드, 호주, 독일, 프랑스, 알라스카, 일본, 카자흐스탄 등 세계 유수 박람회 등에 참가하며,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알렸다.
이렇게 40년 동안 해외공연을 했으니 횟수만 1만회가 넘는단다.
“엑스포에 참가하면 6개월 정도 매일 3회씩 무대에 섰으니 따져보면 셀 수가 없죠.”
오늘날 방탄소년단을 비롯 많은 유명 아이돌 가수가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데에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이름 조차 몰랐던 80~90년대 낯선 이국땅에서 한류의 씨앗을 뿌린 심가영·심가희 대표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애국자라 말해도 과언은 아닌듯 싶다.
■ 엑스포 기억에 남아
40년의 해외공연, 기억에 남는 얘깃거리도 많았다. 역시 한국관 예술총감독을 맡았던 엑스포를 빼놓을 수 없다.
“2010년 중국 상하이 엑스포때 인구 15억명 중 1억명이 관람했는데, 당시 한국관에 공연을 보기 위해 4~5시간 줄을 서는 진풍경도 연출됐어요.”
1980년, 1981년, 1983년 중동 두바이에서 한국 근로자 위로공연 당시 수 천 명이 환호하고 박수를 보내줘 ‘한국인’,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을 느끼게 하고, 감동 받아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고향에서 꿈 이루고파
“열아홉 살 때부터 해외공연 하면서도 늘 고향을 그리워했고,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서 좋은 일을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마음속에 바라던 꿈이 마침내 삼례문화예술촌 운영을 통해 이뤄졌다. 두 자매는 삼례문화예술촌만이 가진 독특한 복합문화공간으로 키우고 싶다는 계획이다. 또한 이 문화공간을 통해 지역주민들과 방문객이 위안을 얻고, 여유와 즐거움을 느끼는 쉼터가 되길 희망했다.
이를 위해 아이들이 뛰어놀고, 만들고, 체험할 수 있는 어린이관 등 미비한 시설도 차츰 보완할 생각이고, 공간도 확장해 삼례문화예술촌을 광주비엔날레나 경주엑스포, 나아가 밀라노 못지않게 키우고 싶다는 큰 그림도 그려놨다.
“40년 동안의 경험을 고향인 이곳에 녹아내고 싶어요. 이제 첫 발걸음을 뗐으니 지역주민들이 이해해주고, 격려해주고, 좀 더 지켜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점점 더 채워서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고,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계속 발전해 나가도록 온 힘을 쏟아 붇겠다’는 심가영·심가희 대표의 꿈을 응원하며, 인터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