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7일 서울 63시티 그랜드볼룸에서 열린 ‘제18회 사회복지의날 기념식’에서 47년 동안 장애인 복지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예로운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한 사회복지법인 국제원 김순옥(71)대표이사.
수상과 관련, “잘 한 게 없는데 큰 상을 받은 것 같아 부끄럽다”며 기자의 몇 번의 인터뷰 요청을 한사코 거절, 삼고초려 끝에 겨우 허락을 받아내 서둘러 국제원이 소재한 고산면 삼기리로 향했다.
가을 해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던 지난 달 23일 국제원에 도착, 직원의 안내로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의 집무실이 생각보다 좁고, 단출함에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재활원과 새힘원, 전북푸른학교 등 120여명이 넘는 국제원 가족의 대표가 사용하는 방 치고는 너무나도 소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꾸미고, 멋 낼 시간조차 없을 만큼, 50년 가까운 세월을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온 그였기에 금 새 고개가 끄덕여졌다.
■ 교직생활 시작
김순옥 대표의 고향은 항구도시 목포다.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부친은 6.25전쟁 때 순교했다.
무질서와 혼란의 시대, 파출소를 만들고, 청년단을 조직, 단장으로 활동할 정도로 부친은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그의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로, 부친이 작고한 뒤, 전쟁 당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홀로 6남매를 키웠다.
“어머니는 쌀가게를 하시며, 억세게 우리를 가르쳤어요. 대단하신 분이셨죠.”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로 올라가 신정동에 작은 방을 얻었다. 공부하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충청도에 사는 언니의 소개로 서울 있는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 국제애육원 운영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중매로 버스운수사업을 하던 남편(故 최승구 제2대 이사장)과 1년 교제 후 1971년 2월 결혼했다. “서울과 군산이다 보니 거리가 멀어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전화와 편지로 만남을 이어갔어요.”
결혼 후, 승승장구하던 버스사업을 접고, 군산에 내려와 시아버지(故 최경현 초대 이사장)가 설립한 국제애육원을 남편과 함께 운영했다.
국제애육원은 미군과 한국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을 미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찾아주거나 입양을 보내 주던 기관.
개인사정으로 외국에 나가게 된 지인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 고심 끝에 시아버지는 논과 밭, 모든 재산을 팔아서 1952년 국제애육원을 세웠다.
“초대이사장이셨던 시아버지는 전주태평교회를 설립할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쳔이셨죠. 한국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거리를 떠돌던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국제애육원 운영을 맡게 됐어요. 편한 생활을 마다하고 힘들고 어려운 길을 택했던 것은 이웃사랑을 실천하려는 시아버지의 강한 기독교정신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완주로 이전
시아버지가 전 재산을 팔아 세운 국제교육원을 남편과 함께 운영하게 된 김 대표. 지금처럼 보조가 없이 자급자족으로 시설을 운영하다보니 장애아동을 돌보는 일이 보람되지만 삶은 늘 고단했다. 더욱이 군산 한복판에다 편의시설이 제대로 안 돼 있어 장애아동들이 생활하는데 힘들어했다.
때문에 장애아동들에게 넓고 편안한 환경을 주고자 군산에서 삼례읍 후정리(현 우석대)로 이전했다. 1만3천평 규모의 부지를 매입해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소도 키우고, 밭도 매보고, 많은 고생을 했다.
■ 학교 설립
장애아동들을 돌보면서 김 대표에게 ‘교육’은 늘 고민거리였고, 반드시 해결해야할 과제였다. ‘장애인들이라고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에 자신이 나서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또 장애아동들을 비장애아동들과 함께 인근에 있는 일반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한글을 가르쳤더니 학교에서 우리 아이들이 1,2 등하고 성적이 좋았어요.”
하지만 장애아동들을 위한 편의시설과 사회적인 편견 때문에 또 다른 고민을 하게 됐다. 문제 해결을 위해 학교 설립을 결심하고, 교육감을 찾아가 특수학교 인가를 냈다.
“당시 유재신 교육감님에게 학교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지 여쭤봤더니 전북에는 하나 밖에 없으니 전북재활학교라고 지으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고요.”
1984년 전북재활학교를 설립하게 됨에 따라 장애아동들이 마음의 안정을 얻는 등 편안한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후 고산 삼기리로 이사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설립하면서 ‘재활’을 빼고 공모를 통해 지금의 ‘전북푸른학교’라고 이름 지었다.
■ 고산에 터 잡아
삼례에서 학교를 설립, 안정적인 운영을 이어갔다. 하지만 인근에 있던 우석대학교의 확장계획에 따른 완주의 교육 복지와 지역발전을 위해, 무엇보다 장애아동들의 심리적·환경적인 안정을 위해 이전지를 물색하던 중 고산면 삼기리를 최적지로 보고 이전을 결정했다.
이전 후 학교 설립과 함께 장애의 정도와 특성에 따라 다른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판단, 중증장애인을 위한 요양시설 ‘어린이새힘원(현 새힘원)’을 개원(‘90년)했다.
새힘원 개원으로 국제원은 3개 기관을 갖추게 돼 보다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됐다.
■ 기억에 남는 일
장애아동들을 돌본지 올해로 47년째를 맞은 김순옥 대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지난 세월을 되돌아 볼 때, 기억에 남는 일은 몇날 며칠을 이야기해도 부족하다.
그 가운데서도 정형외과 치료가 필요한 지체장애아동과 소아마비장애아동이 지금처럼 제대로 된 병원과 물리치료실이 없어 치료를 하지 못해 결국 백방으로 수소문해 미국 평화봉사단에 직접 요청, 물리치료사 지원을 받고, 의료선교단에 요청, 정형외과적 재활수술을 지원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단다.
■ 부친 기도 이루다
“우리 아버지는 장로님, 어머니는 권사님, 시아버님도 장로님,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어요. 특히 아버지께서 기도회를 열심히 다니셨다고 들었는데요. 아버지는 늘 ‘우리는 딸들이 많으니 딸 넷 중에 불쌍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딸이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도하셨다고 들었어요.”
아버지의 기도를 김순옥 대표가 이룬 셈이다. 어려서부터 아이들 돌보는 일을 좋아했던 그가 다시 시간을 되돌려도 이 길을 걸을까? 물었봤다. “워낙 힘들어서 자녀들에게 만류하려고 했는데, 우리 애들이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안하면 누가 하겠나? 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돌아가도 이일을 할 것 같아요.”
■ 가슴 아픈 편견
김순옥 대표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일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다. 맨 처음 학교에 보냈는데 아이가 울면서 돌아와 ‘왜 우냐 묻자?’ 아이들이 장애인라고 놀렸다는 것.
“우리 장애아동들이 학교에서 연필을 깎고 있다가 칼만 가지고 있어도 아이들은 ‘칼로 위협했다’고 부모에게 이르고...속상할 때가 많아요.” 또 성폭행, 착취 등 사고가 터지면 마친 모든 시설이 그런 것처럼 언론에서 확대 보도하는 것도 안타깝게 느낀다.
뿐만 아니라 아침에 씻겨서 직장에 보냈는데 옷에서 냄새나고 더럽다며 트집을 잡고, 계산을 못한다고 야단을 치는 경우 등 장애인에 대한 잘못된 사회의 시선도 개선되기를 희망했다.
덧붙여 장애인 인권문제가 어떻느니 운운하기 전에 시설에 와서 장애인들과 1박 하면서 장애아동들의 현실을 느껴봐야한다고 조언했다.
■ 계획 그리고 소감
김순옥 대표는 지난 2005년부터 전라북도사회복지협의회 부회장과 완주군사회복지협희회 수석부회장으로 장애인 복지 증진에 앞장서고 있다.
또 전라북도장애인축구협회장으로서 장애인 스포츠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아울러 완주군 내 사회복지사들로 완주으뜸합창단을 창단, 사회복자사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고 있다.
이처럼 47년 동안 장애인 복지에 혼신의 노력을 다한 결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눈감을 때까지 장애인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국제원 김순옥 대표. 못 다한 이야기가 너무 많아 아쉽지만 수상소감을 듣는 것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친다.
“잘 한 게 하나도 없는데 우리 종사자들이 피땀흘려 장애인들을 돌본 덕분에 내가 대신 대표로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