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고산면 서봉리에 조을정이 살았고 김수인(金守仁)·구신동(具信童)·박지(朴誌)가 그의 사위다.
△김수인은 고령김씨로 그 후손들이 어우리에 살고 △능성구씨 구신동 자손은 삼기와 율곡리에서 집성촌을 이뤘으며 △박지는 밀양박씨로 비봉면 수선리 평지마을이 연고지이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조을정 병사의 기념비나 구조물을 세우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서봉리 관덕과 소농골에 김씨-구씨-박씨의 종산이 이어져 있음은 재산분배 과정에서 딸·사위에게 준 땅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처가 조씨는 묘하게도 서봉에 사는 이가 없고 3사위는 자손-재산-인물이 많아 고산현 8대 성씨의 중심을 이루는 씨족이니 ‘음수사원(飮水思源)’ 외가 평양조씨와 3동서 3족은 서로 존중하며 사이좋게 살아야한다.
▲박열(朴說:1464∼1517)은 아들이 없어 형 박지 2남 세정(世貞)을 양자했고, 세정은 당시 활 쏘는 솜씨가 놀라웠다.
연산군(재위:1494~1506)이 활 4개를 내주며 “이철동(李哲同) 등 3인과 시위(侍衛)하는 장사 중 활 시위를 ‘능히 가득 잡아당길’ 자가 있으면 이 활로 쏴 저 과녁을 뚫으라.”하였다.
병조판서 이극돈(李克墩:1435∼1503)이 시위하는 장사 17인과 이철동 등 3인을 뽑아 번갈아 시험해 보았으나 모두 활을 당기지 못했는데, 유독 ‘겸사복(兼司僕) 박세정’만이 능히 이를 잡아당겼다.(연산군 8.2.12③조선왕조실록/出强弓四, 仍傳曰:李哲同等三人 及 侍衛將士有能引滿者, 以此射貫革。兵曹判書李克墩擇侍衛將士十七人 及 李哲同等三人, 遞試之, 皆不能彎, 獨兼司僕朴世貞能彎之)” 대단한 장사로 그의 묘가 관덕 앞산에 있다.
▲구신동 며느리 평산신씨의 외할아버지는 한치인(韓致仁:확 아들), 세조의 좌리공신(佐理功臣)으로 인수대비(仁粹大妃/덕종비)와 남매간이다.
▲갑사(甲士) 김수인(金守仁)이 ‘밤에 창경궁 남수각(南水閣) 전목(箭木)이 부러져 허술한 틈으로 몰래 들어간 죄를 저질렀다’.
상이 “어떻게 해야 하겠나?”고 묻자, 영사 김극성(金克成:1474∼1540)은 “죄가 매우 중한 걸 몰랐기 때문이니 참작하는 게 옳겠습니다.” 익산 소세양(蘇世讓:1486∼1562)은 “시골 사람이라 틀림없이 그 죄가 중한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김안국(金安國:1478∼1543)도 “그 실정으로 봐 가벼운 듯합니다.”이렇게 아뢰었으며, 유여림(兪汝霖:1476∼1538)·정백붕(鄭百朋)의 여쭘도 같았는데 상께서 “그 실정을 캐보면 사형에 처하는 건 지나치니 사형을 감하라.”고 하였다.
우리는 선대 어르신들의 삶속에서 관용과 선처를 배워야한다. 단호하면서 관대함이 인정인데 고산에 이런 인물이 많아 자랑이다. 고산 ‘金-具-朴’은 한 핏줄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