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우리 형님 이름을 다소 아는 편이다. 사람 좋고 인정 많아 좀처럼 남에게 듣기 싫은 소리 않으며 빚 독촉도 못해 가져오기만 기다렸다.
비료 뿌린 논물 빼가도 제대로 욕하지 않아 혹자는 병신 더러는 군자라 한다.
평생 ‘자기 앞에 큰 감 놓지 않는 사람’이란 평판을 듣고 산다. 약자를 위해 추렴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으며 마을 술먹이 날 마른 명태 한 떼를 꼭 내는 덕가이다.
그러나 나이한테는 별 수 없어 지팡이를 짚고 다니며 귀가 어둡다.
어느 날 동생이 형님 소일을 물으니 솔직하게 대답한다.
80대 노부부는 날마다 ‘노인 요양원 적응훈련 중’이란다. 말씀 멈출까 봐 놀란 체를 하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했다.
“자손들과 사회를 바르게 알고 처신해야 한다.”며 알다시피 요양병원은 현대인에게 적절한 시설로 노인들의 안식처란다. 이런 추세에 따라 건강할 때 적응해 둬야 하므로 이웃 요양원에 나아가 복도, 화장실, 식당, 쉬는 자리를 둘러보며 하나하나 익혀둔다는 게다.
형은 동생에게 “화산 술독(숫돌)백이 알지 않나?”고 묻는다. 들었다고 대답하니 천세후(千世厚) 숫돌장수 얘기를 한다.
단지 밥을 해 먹으며 다니던 혈혈단신 홀아비가 들에서 죽었는데, 주머니 속에 돈이 있고 “논두렁에 걸쳐 죽으면 위아래 두 사람이, 한 논배미에서 죽었걸랑 그 논 임자가 이 돈으로 치상해 달라”는 쪽지가 있었다고 한다.
“이를 안 마을 사람들이 꽃상여에 태워 장례를 치러주었지.”, “숫돌장수도 이랬거늘 나도 1억원이 있네. 혹시 형수나 내 몸이 불편해지면 동생이 서둘러서 요양병원에 보내주게나.”
“전엔 구산(求山)하여 묘 쓰고 종답 장만 시제까지 대비했지만, 세상이 바뀌어 고려시대 정도로 변했으니 산 사람 부담을 주기 싫네.”, “빚 독촉 잘하고 논두렁 깎아먹던 얌체들 보다 욕심 적은 내가 낫지 않나?”, “난 복이 많네. 아들 3형제에 딸이 둘, 손자손녀 여럿에 동생 있으니 난 천복(天福)일세”
“나 들판 일 안했어도 지난 어버이날 전북혁신도시 채선당(菜鮮堂)에 갔지. 처음 들을 땐 기생집인가 했어.”, “서울 삼천각이나 대원각 생각을 했지. 먹을 것이 100가지가 넘더군. 샤브샤브 쇠고기부터 아이스크림, 한국 채소는 물론이고 외국 과일까지 거기 다 있는데 한 가지씩만 먹어도 배터지겠더군!”
“이만하면 자네나 내 아들 모두 효자 효부 아닌가?”, “아이들이 집안에서 병수발 하지 않게 하는 게 도리라는 걸 잊지 말세나”
우리 형님은 매우 건전하다. 노인들이 가정·마을·나라의 짐이 되지 않도록 숨어주는 게 어른이란다.
‘자기는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씀이다. ‘음마투전(飮馬投錢:말에 물을 먹이며 돈을 던져 둠)’에 가까운 이야기 듣기 좋은 소리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