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 나란히 앉아 포도주를 마신다. 장사익의 가냘픈 목소리 ‘봄날은 간다’가 울려나온다. 창 너머 먼 산의 하얀 벚꽃이 아름답다. 고덕심은 어딘가로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몸을 하상용 어깨에 기댄다. 하상용 싫지 않지만 방에 들어가 쉬라고 권한다.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누었다. 아직 양인의 피부가 부드럽다. 고덕심은 잃어버린 지나간 청춘과 지금 노추를 한꺼번에 찾았다. 진정 ‘인생이 이런 게구나’를 느꼈다. 4월 13일 구이제에서 ‘부럽습니다.’고 했던 그 부러움을 몸소 실천하고 보니 사례 즉 빚 갚을 생각이 난다. ‘부인 허리가 아프다고 했지! 바로 이거다’며 경기도 성남 척병원에 전화하여 진찰시간을 잡았다. 고덕심은 부인 유정분을 찾아가 성남 동행을 사정해 승낙을 얻었다. 의사는 때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왔다며 수술과 입원 1주이면 거뜬해 질 것이란다. 남편 하상용은 업무진행서에 도장만 찍으면 된다. 의사 말이 반갑고 우선 낫고 보자며 날인을 선뜻했다. 고덕심이 한 주간 병 수발을 하며 병원비까지 다 냈다. 석 주가 지나자 씻은 듯이 나아 몸이 거뜬해졌고 고마워 자주 연락하며 지내는데 어느 날 갑자기 고덕심 소식이 끊겼다. 아파트에 찾아가 물으니 얼마 전 이사했는데 간 곳은 모른다고 한다. 안타까워 애를 태우고 있을 때 유정분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발신인은 고덕심! 얼른 펼쳐보니 “언니 수술 부위 어떠세요. 지난날 고마웠어요. 언니는 대단한 여걸이예요. 남편 손을 제 손 위에 얹어 준 그 여심 대단해요. 전 평생 못 누렸던 청춘을 언니 남편을 통해 노추까지 맛봤습니다. 제가 언니 곁에 없어야 여자끼리의 의리입니다. 누구나 남편 곁에는 한 여인만 있어야 하지 않나요? 그래서 저는 양아들 집에 들어갔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고덕심”. 남편을 빌려준(?) 유정분이나 더 이상 딴 생각을 접어버린 고덕심 모두 거물들이다. 단순한 남자는 후일 고덕심 묏자리까지를 염두에 두었다. 고덕심은 자라던 고산읍내에 가보니 집안으로 들어오던 물길도 구멍도 사라지고 시멘트 포장길에 집터는 이리저리 흩어졌다.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 돌아오며 남봉리에서 읍내를 바라보니 대 명당이다. 뒤를 감싼 산줄기와 가까운 남천 냇물이며 너른 들판 나무날 데 없다. 자랄 당시까지만 해도 여자의 시장출입을 상스럽게 여겼다. 고덕심 아버지가 더욱 심했다. 고덕심은 나란히 누어있던 하상용 귀에 “전 하 선생님을 압니다.” 하상용은 깜짝 놀랐다. “열일곱 살 적에 고모 따라 학교운동회에 처음 갔는데 하얀 운동복차림 호루라기를 불며 학생을 지도하시던 그 멋진 모습을 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 그 때 그 말을 좀 했어야지…”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
최종편집: 2025-06-24 17: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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