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시장 바닥에 이런 속담이 있었다. “안 사도 좋으니 ‘안사’처럼 떠나라” 여기 안사는 ‘이안사’인데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고조부(高祖父)이다.
1280년(고려 충렬왕)대 이안사가 완산(完山)을 떠나 삼척(三陟)으로 갔고 4대 째 고손자가 왕이 됐으니 이 이상 더 큰 성공이 어디 있으랴.
고향 떠나 120년 안팎에 왕가를 이뤘으니 이 정도라면 전설, 소설, 가짜 뉴스가 쏟아지기 마련이다.
‘이안사 비록 여자 문제로 부득이 전주를 떴지만 대성을 한 것처럼 너도 그리 되라’는 내용이 함축된 속담이다.
4월 10일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翰)공의 대제를 마치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임역원이 효자동 마전(馬田)을 들렸는데 이유는 마전이 ‘풍패지향(豊沛之鄕)의 원향(原鄕)’이기 때문이다.
이안사가 170호를 거느리고 떠난 완산에 8촌 이개(李開)는 남았고, 그 후손들이 덕진 시조 산[조경단]을 보살피며 지켜 내려오자 개국 후 고조부[목조]와 본인 태조의 고향이기에 ‘풍패지향’ 영광스러운 이름이 붙었다.
그런데 세상인심은 온통 권력 있는 임금 쪽 집안으로만 쏠리기 마련,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런 세월이 600여년을 흘러서야 전주수호 마전 씨족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리고 ‘원향’을 방문한 게다.
마전은 이문정이 세운 전주 최고(最古) 정자 문학대(文學臺)도 유명하지만 실은 그의 손자 이백유가 개국 3등 공신으로 마흔 세 살에 조선 4대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왔다.
당시 전주 서십리(全州西十里) ‘마전(麻田)’에는 말 탄 사람 그칠 날이 없자 마을 이름이 바꿨다.
말 맬 자리가 모자라다보니 삼밭[麻田]에까지 말을 맬 수밖에 없어 ‘삼밭[麻田]’이 ‘말밭[馬田]’이 되었다는 게다.
하여간 오늘 서울 귀빈의 방문은 △해와 달의 만남이요 이안사(李安社)와 전주하늘과 땅의 만남이라는 풀이도 가능하다.
시조 묘가 건지산(乾止山)에 있고, 이문정 이백유 조손(祖孫)의 황강사(黃崗祠)가 곤지산(坤止山) 아래에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사당이 불탔고 칠육갑(七六甲)이 지나 420년이 되는 정유년 이 봄의 내방은 우연히 아니라 어떤 예정된 이치로 봐야한다.
△사단법인전주이씨대동종약원 이사장(이태섭:李台燮:전 과학기술처장관)과 △시중공파황강종중회장(李順燮) ‘양 섭(兩燮)’의 응접은 워낙 의미가 커 옛날로 소급해 16촌의 만남, 8촌의 상봉이라는 의미 부여에 친근감을 더 느꼈다.
성공할 수만 있다면 고향을 떠나라. 강원도 삼척 지명에서 ‘척(陟)은 오를 척’자로 ①이안사 자기를 ‘목조’로 ②현손을 왕으로 ③집안을 왕가로 올려놓았다. 삼척 지명에 대한 우수개 소리다.
시중공파 손님대접에 익숙한 씨족의 영광을 누리기 바란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