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비봉면 수선리 평지마을 회관 앞에서 ‘박태근 옹(翁) 공적비 제막식’이 열렸다. 이날 제막식은 밀양박씨 청백리 이정공 16세손 종중에서 자수성가해 교육·장학·지역발전사업과 종중 활성화에 큰 공덕을 쌓은 만권당 박태근 옹의 후덕함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마련됐다. 식목일인 지난 5일 박태근 옹을 만나 걸어온 발자취를 함께 따라 걸었다. ■ 청운의 큰 꿈 품고 상경. 박태근 옹(86)은 지난 1932년 4월 2일 완주군 비봉면 수선리 평지마을 348번지 한 오두막집에서 부친 박윤석, 모친 진주임씨 여사의 4남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1949년 화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전주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배움에 대한 열정은 많았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에다 6.25까지 발발하면서 졸업을 하지 못했다. 1958년 12월 28일 해병대 4년 8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한 그는 1년 동안 고향에서 형과 함께 농사일을 하다 이듬해 12월 25일 청운의 큰 뜻을 품고 상경했다. 부친으로부터 받은 땅 300평을 판 돈(쌀 30가마)을 손에 쥐고 서울에 도착, 군대에서 만난 후배 집에서 보름동안 기거했다. 그가 상경 후 처음 시작한 일은 노량진 시장 인근 빌라 현장에서 벽돌을 짊어 나르는 것. 마침 후배가 조적기술을 가진 터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돈 벌 생각에 15일 동안 부지런히 땀 흘려 일했다. 하지만 업체 사장이 중간에서 돈을 가로채 달아나 한 푼도 받지 못했다. 허무하고, 허탈했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일을 다시 찾아 나섰다. 상경할 때 가져온 돈으로 리어카(손수레)를 구입한 뒤, 군 동기와 함께 노량진 시장에서 생선을 팔았다. “친구는 수줍어서 말을 잘 못하는데, 나는 먹고 살아야하니 부끄러운 것이 뭐가 있겠어요. ‘생선사세요!’소리치며 팔았죠.” 생선 팔다 건달들을 만나기도 하고, 세 얻어 사는 집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죽을 뻔했던 경험을 하는 등 서울의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 책 장사 뛰어들다. 박태근 옹은 한학을 가르친 조부의 영향을 받아서 일까? 당시 우아하고 낭만적인 연애 찬미의 시인으로 유명한 하인리히의 ‘하이네 시집’을 한권 외우고, 군 입대 할 때도 영한사전, 한영사전을 사가지고 들어갈 정도로 책을 늘 가까이 했다. 서울에서도 마찬가지. 외롭고 힘들 때면 책을 통해 위안을 얻었다. 어느 날 청계천 6가에 있는 헌책방을 지나다 우연히 노점에서 포대를 깔고 책을 파는 화산초 친구를 만나게 되고, 그 친구와 함께 책 장사를 시작했다. “당시 안네의 일기 등 최고로 잘 나가는 책들을 사다가 청계천 6가에서 1가까지 자전거에 책을 실어 팔기도 하고, 밤에는 전등불이 환하게 비춰주는 조흥은행 본점 앞에다 책을 펴놓고 팔았어요.” 평소 친구와도 같은 책이었지만, 평생 직업이 되어 줄 것이라는 생각은 이때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않았단다. 어째든 노점에서 책장사를 이어가던 그는 호형호제 하던 두 사람과 함께 신축한 평화시장 1·2·3호를 나란히 분양받았다. 노점생활을 정리한 것. 그는 사업 초기 책이 많이 없었던 터라 안경점 사장과 2평 남짓한 가게를 썼다. 낮에는 헌 책 외에 군 입대 때 영어사전을 가지고 갈 정도로 영어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외국서적을 취급하는 범문사에서 당시 베스트셀러인 안네 프랑크가 쓴 안네의 일기를 비롯 영어영문학 원서 등을 구입, 외국어대학 건물 아래서 펼쳐놓고 팔았다. “외국어대 학생들이 원서로 공부하다보니 광화문 서점에 가서 50~100권씩 책을 구입해서 버스타고 외국어대로 가서 파는데,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죠.” 평화시장 내 64호로 가게를 옮겨 ‘외국서적’이라는 간판을 걸고 책 장사를 계속 이어갔다. 부지런히 헌책방을 돌며 책을 모아 다시 팔다 보니 돈도 제법 모았다. ■ 한신문화사로 제2 도약. 서점 운영 7년째 되던 1973년 6월 25일, 사업 규모를 확장하기 위해 ‘한신문화사’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등록, 종로 5가에서 제2의 도약을 위한 첫 걸음을 뗐다. 그는 외국서점을 운영한 노하우를 기반으로 외국에 나가 대학교재 원서를 사 들여와 번역 출간해 국내 종합대학에 보급시켰다. 그러다 보니 ‘한신문화사’는 영문학 관련 서적으로는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서울 창신동에 살 때 책을 팔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고속버스 타고, 대전과 대구, 다시 부산으로, 광주로 가는 날이 허다했어요.” 이처럼 부지런히 일하다보니 회사 매출도 늘었다. ■ 국내 종합대학에 도서 기증. 1976년부터는 회사 성장과 비례해 94개 종합대학 중 매년 2개 대학을 선정, 자사가 출판한 대학교재와 수입 영어어문학 서적을 기증키로 회사방침을 세웠다. 이는 1975년 경북대학교와 인연을 맺은 뒤, 도서 300권을 기증, 대학총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은 일이 영향을 준 것. “감사패를 받고 나니 돈을 벌기 위해 뛰어다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됐죠.” 2001년 2월 25일 항공대학을 끝으로 책 기증이 마무리 됐다. 그동안 총 72개 대학에 자사와 외국 수입 서적을 포함 3500가지 책을 기증했으니 합하면 수십 만 권에 이른단다. “2010년도 3월에 출판사를 접었으니 그때까지 (기증을)했다면 나머지 20여개 대학도 다 줬을 겁니다.” ■ 지역 발전 및 후진 양성 매진. 책 기증뿐 아니라 박 옹은 1976년 한신문화사 장학재단을 설립, 모교인 화산초와 화산중, 비봉초 수선분교에 매년 장학금과 책을 전달하는 등 후진 양성에도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대학에도 주는 것은 좋지만 내가 태어난 고향에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박 옹에게 장학금 관련, 에피소드도 있다. 학업성적이 우수한 학생 중 1, 2, 3등을 뽑아 교육감상과 한신문화사상을 줬는데, 학생들은 한신문화상을 최고로 꼽았단다. “교육감상은 종이 한 장이 전부고, 우리 한신문화사는 당시 민중서관에서 출간하는 영한사전, 한영사전, 국어사전, 타 회사 옥편 등 4권을 한 세트로 묶어 선물했으니, 학생들은 아무래도 우리 회사상을 좋아하지 않았을까요?” 도서 기증, 후진 양성과 함께 평지마을회관 건립, 면사무소 및 파출소 건축 등에 성금을 기탁하는 등 비봉지역 발전에도 많은 공을 세웠고, 경기 고양 이정공 묘소 묘비 건립 등 서울 이정공 초대회장으로서 종친회 활성화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박태근 옹은 45년 동안 출판업에 종사하는 동안 미국출판협회의 저작권 침해 혐의로 고소당하고, 400평 창고에 보관된 책을 압류당하는 일도 겪었다. 하지만 국내 대학교수 등이 국내 영문학 발전을 위해 노력한 공이 많다며 서명운동을 벌여 다시 출판사업을 이어가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생애 최고의 생일잔치. 사업을 정리하고 고향 비봉에 내려온 지 5년 째 라는 박태근 옹.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종친회에서 마련한 공적비 제막식은 4월 2일에 열렸다. 우연히도 자신의 생일과 같은 날이었다. 이날 가족, 친인척, 주민 등 많은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생애 최고의 생일 잔치를 열게 됐다며 기뻐했다. ‘부모님도 8살차, 아내 유복연 여사와도 8살 차’라며 만날 수밖에 없었던 인연임을 강조하며, 사업을 후회 없이 성공적으로 할 수 있도록 내조해준 아내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울러 장남 수봉씨와 딸 유경·경원씨의 앞날에도 건강과 행복의 빌며, 훗날 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기억되는 자녀들이 되길 바란다는 메시지도 전했다.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10년만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 날 성공이라는 단어를 얻게 될 겁니다.” 책과 함께 45년을 후회 없이 살면서 박태근 옹이 깨달았다는 삶의 교훈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앞날에 건강과 축복이 가득 넘치길 기원한다.
최종편집: 2025-08-11 01: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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