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산업단지에는 현재 약 600여명의 외국인 근로자가 각각의 산업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모국을 떠나 대한민국하고도 전라북도 완주군이라는 먼 타향에서 가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땀 흘리는 외국인 근로자들.
하루하루 내일의 희망을 가슴에 품고, 열심히 일 할 때는 그저 즐겁고, 행복하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이곳에서 ‘외로움’을 느끼며, 눈물을 흘릴 때가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러한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좋은이웃 정용기(65)대표가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완연한 봄 날씨를 보인 지난 13일 완주산단공원에서 정 대표를 만났다. 세월을 비켜간 듯 65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안(童顔)인데다 옷 입는 스타일도 세련돼 보였다.
더욱이 환하게 웃는 얼굴에서 오래 전부터 알아왔던 사람처럼 푸근함이 느껴졌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왜 외국인 근로자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지 궁금함에 서둘러 질문을 던졌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그러니까 2006년 1월 쯤, 한 마트에 갔다가 손가락 세 개가 잘려 재활 중인 베트남 청년을 만났다.
마트에 앉았는데 축 늘어진 모습이 안쓰럽게 보여 다가가 차 한 잔을 주며,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청년에게 ‘나랑 친구 할래? 내게 아버지라고 불러’라고 말하자,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고, 그 일을 계기로 정씨는 11년 동안 외국인 근로자들의 아버지가 됐단다.
정씨가 오랜 시간동안 외국인 근로자들에게 아버지라 불리 우는 진짜 이유가 있었다.
네팔에서 온 한 청년 이야기다. “새벽에 ‘아버지! 나 아파요!’라고 전화가 와서 삼례 고려병원으로 달려갔어요. 회사를 그만 두고, 일자리를 찾아다니다 무릎이 크게 다쳤는데, 의료보험도 안 되고... 고맙게도 병원에서 잘 처리 해줬죠.”
수술한 뒤, 정씨가 얻어 준 방에서 두 달 동안 쉬다가 깁스 풀고, 항공권도 구입해준 덕분에 고국으로 돌아가 결혼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또 하나, TO(일정한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를 받아놨으나, 아파서 회사에 들어가지 못한 네팔 청년 이야기다.
당시 완주병원에서 20일 입원했는데, 돈이 없다는 딱한 사정을 듣고 의사가 병원비에 보태라며 10만원을 준 사연도 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갈 곳이 없어 힘들어 하는 청년을 위해 정씨는 송광사 스님에게 기거할 수 있도록 부탁, 흔쾌히 허락을 받았다.
그런데 또 다시 몸이 아파 전주의 한 종합병원에 한 달 입원을 했다. 문제는 병원비가 180만원이 나온 것.
정씨는 80만원을 들고, 원무과장을 만나 수차례 설득 끝에 결국 지불하고 퇴원시킬 수 있었다.
“계속 안 된다고 하는데,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없으니 애 데리고 도망가야 겠다’고 엄포를 놨더니 끝내 알았다고 해줬어요.”
스쳐 지나 듯 언제 떠날지 모르는 외국인 근로자들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 가족의 일처럼 생각하며, 함께 아파하고, 걱정해 주는 것을 뛰어 넘어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는 정씨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지만 지나온 삶을 들여다보면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정씨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가슴 찡한 일화도 있다. “연말이었어요. 빵을 사가지고 외국인 숙소로 갔는데, 외국인 3명만 남겨놓고, 자기들(한국인)끼리 사장하고 회식하러 갔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화가 났어요.”
정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큰 절을 한 뒤 ‘내가 한국 사람으로서 미안하다’며 대신 사과했단다.
“한국인이라는 게 부끄러웠어요. 정말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 날 곧바로 그들을 데리고, 인근 음식점에서 삼겹살과 소주로 아픈 마음을 달래줬죠.”
사연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잠시 눈시울을 붉혔다.
이어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을 말했는데, 기자도 몰랐던 사실들이 많았다.
한 예로 상당수 외국인 친구들이 국내 들어올 때 한국어 시험 80점을 얻어야 제조업체에, 80~60점은 농장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만난 한 우즈벡 친구는 모스크바대학 출신이면서 6개 국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했다.
이런 친구들이 피부색과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인격이 무시되고, 차별대우를 받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정씨는 토로했다.
“한국 사람들이 하기 힘든 일, 싫은 일을 이 친구들이 다 하잖아요. 공짜로 밥 먹고, 돈 버는 것 아닌데 왜 이들이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지 마음이 아픕니다.”
덧붙여 정씨는 “600명의 외국인 친구들이 당장 일을 안 하게 되면 완주산단은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물론 지금은 외국인 근로자들을 한국인들과 동등하게 인격적으로 대우해주는 산단 기업들이 많다는 것도 강조했다.
조금은 무거운 대화를 접어두고, 외국인 친구들과 함께하며 즐거웠던 시간들에 대해 얘기를 이어갔다.
먼저, 매년 열고 있는 외국인 위안잔치에 대한 이야기다. 이 행사는 ‘외국인 근로자는 늘어나는데 이들에게 해 줄 수 있을 게 없을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됐다.
일요일이 되면 갈 곳 없어 숙소에 하루 종일 머무는 이들이 1년에 단 한차례라도 재밌고 즐겁게 놀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고민 한 끝에 위안잔치를 열기로 했다.
벌써 11년 됐다. 1회 때는 50여명이 모였는데, 지금은 350~400명 정도 참석하는 큰 행사로 발전했다.
이날 외국인 근로자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도 나누고, 식사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마음껏 즐긴다.
자신이 오랫동안 활동하던 봉사단체 천천클럽(천원씩 내는 천명모임)이 주최해왔으나, 지금은 현대자동차 노조 및 직원들과 함께 만든 ‘좋은이웃’이라는 단체가 힘을 보태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좋은 뜻을 가진 행사에 산단 내 세진공업(대표 서강일), 봉동로타리클럽(회장 이근우) 등 관내 기업과 단체는 물론 아내와 아들, 딸들도 든든한 후원자로 나섰다.
“혼자서는 안되죠. 주변의 많은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정말 고마움을 느낍니다. 아직 우리 사회는 살만한 것 같아요.”
최근에는 완주산단사무소와 박성일 군수의 관심 및 지원 덕분에 복지관 리모델링, 헬스클럽 설치 등 외국인들을 위한 공간들이 생겨나 마음이 뿌듯하단다.
정씨가 외국인 근로자들과 함께 했던 11년간의 이야기는 2박 3일 동안 들어도 모자랄 정도로 이야기 거리가 넘쳐난다.
친구보다 외국인 친구를 만나는 게 큰 행복이라는 정씨. “친구들 안 만나냐고 물어보는데 전 우리 아들들이 좋아요. 제게는 600명의 아들이 있잖아요. 얼마나 든든해요.”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정씨는 음료수, 컵라면을 사들고 아들들이 있는 숙소로 향한다. 문을 열면 ‘아버지!’하고 아들들이 반갑게 맞는다. 올해로 11년째. 이제는 일상이 됐다.
마지막으로 좋은이웃 정용기 대표에게 꿈을 물었다.
“누구에게 칭찬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남은 인생 우리 아들들과 함께 지금처럼 살고 싶어요. 세상에서 나 만큼 행복한 사람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