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最高)는 ‘가장 높음과 으뜸’을 말함이요, 최고(最古)는 ‘가장 오래 된 것’을 가리킨다.
최신 것 가리기도 어려운데 오래 전 얘기를 한다는 자체가 무모하며 서열 지어 좋을 일도 아니지만 취미 삼아 대충 알아본다.
△비록 증(贈)이지만 ‘영의정(領議政)’은 우주황씨 중시조 거중(居中)으로 고려 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했으며 1380년 이성계 장군과 함께 운봉전투 황산대첩을 이끌었고 용안성(龍安城)을 쌓을 때 참여했으며 조선개국원종공신으로 전서(典書)를 지내고도 두 번의 왕자 난을 잘 비껴 장수해 그 묘는 비봉면 내월리에 있다.
△황거중의 사위 유습(柳濕:고흥유씨)은 세종 원년(1419) 53세에 중군(中軍)도총제로 7월 7일 대마도 정벌에 나선 장군으로 이 묘 역시 비봉면 달실에 있다.
△위봉사 터는 고려 말 최용각(崔龍角)이 고산에 왔다가 잡았고 지금도 잘 유지돼 완주 자랑이다.
△경천면 국보 사찰 화암사는 신라가 백제를 무너뜨리고 민심 수습과 해원을 목적으로 세웠다고 본다.
△오래 된 정자는 세종 때 고산현감 최득지(崔得之)가 세운 고산면 삼기리 ‘삼기정’이다.
△고산향교 옆 은행나무는 관리가 부실해 죽어가지만 문묘 건축 연대로 보아 조선 초기에 심은 나무일 것이다.
△운주면 용계성(龍鷄城)은 견훤의 전설 후백제 건국과 관계가 있어 복원해야 한다.
△구이면 덕천리 ‘거북바위’는 고인돌이 확실하며, 봉동읍 구암리 바위와 함께 완주의 거석이다.
△고산면 소향리 관광농원 맞은편 쌍바위 움푹 파인 데는 수 억 년 오랜 세월을 두고 물에 씻긴 흔적이다.
△봉동읍 구만리는 비록 불우했지만 조선 태조의 제4남 회안대군 이방간이 한을 삭이며 사신 마을이다.
△봉동읍 제내리 방죽은 마을이름 ‘제내리’를 낳았으니 오래된 방죽임이 확실하다.
△삼례리 ‘벌샘’은 혹 사라질까 늘 불안하며 ‘벌판 샘’에서 온 이름이다.
△화산호 바닥은 운제현(雲梯縣) 옛터로 유성보(兪成保)가 이성계의 개국에 협조하지 않아 귀양 온 곳이다. 이 집안에 8남 8녀를 낳은 밀양박씨는 하나를 실패해 그렇지 17인을 출산 최고 기록의 보유자이다.
△전주 유씨 시조 유습 묘가 율곡리에 있었으나 몇 년 전 전주시 인후동으로 이장했다.
△삼례역과 고산현 옥포역(玉包驛)은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온다. 6만원(4인분)짜리 밥상 앞에서 겨우 40∼50분 벌떡 일어서지 말고 쓸 것과 몹쓸 것을 이야기하며 지역에 공헌한 출생 100년 된 인물도 찾아보기 바란다.
완주문화원(원장:이행구)은 근래 송하진 전북도지사 제자(題字)로 된 『완주인물지(450면)』를 펼쳐냈다. 절판되기 전에 구해보는 이가 지식인이다. 용진읍 봉동장례식장 뒤 언덕의 묘한 바위는 혹 제단이 아닌지.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