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봉동 버스터미널 옆 봉상신협(완주군 봉동읍 봉동로 139) 3층에 최근 변호사사무소가 들어섰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두세훈 변호사 사무소’라고 걸개 현수막이 큼지막하게 게시돼 있었다.
오늘 인터뷰로 만나 볼 두세훈(40)변호사는 완주 봉동읍 장기리 쌍계마을 두병식(74)·유은순(71)씨의 3남1녀 중 막내다.
오는 11월 9일 개업을 앞두고 있는 그가 무변촌(변호사가 없는 곳)인 완주군에 1호로 개업한 사연과 그간의 살아온 이야기, 앞으로 계획, 포부 등을 들어봤다.
▲완주 봉동읍 출신이라고 들었는데요.
네. 봉동읍 장기리 쌍계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요. 봉동초등학교(66회)와 완주중학교(44회)를 졸업했는데, 초등학교때는 공부를 못했어요.
그 때는 학교 갔다 오면 책가방 던져놓고 친구들과 개구리 잡고, 놀러다니기 바빴죠.
그 당시에는 모든 시골이 그랬던 것처럼 부모님이 아이들 교육에 신경 써 줄 만큼 여유가 없이 그저 먹고 사는 문제에 치중했던 것 같아요.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초등학교때는 목장주인이었어요. TV를 켜면 드라마에서, 광고에서 대관령 목장이 많이 나오고...멋있어 보여서 막연하게 꿈을 꿨습니다.
중학교에 올라가 철이 들었어요. 어려운 형편에도 열심히 뒷바라지 하는 부모님을 보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주말 없이 매일 밤 9시까지 공부에 매달렸죠.
그 결과 모의고사는 항상 1등 했어요. 공부를 조금 하다 보니 꿈도 약사로 바뀌었구요.
고등학교 때는 전주로 학교를 다녔는데 부모가 의사거나 잘 나가는 친구들이 많아서 인지 저의 꿈도 덩달아 더 커져서 의사가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학창시절을 뒤돌아본다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전라고등학교에 입학했어요.
새로운 환경이다 보니 처음에는 적응하기 쉽지 않았어요.
입학 당시 상위권이었는데 봉동 집에서 버스 타고 등하교를 하다 보니 몸이 피곤하고, 공부도 집중이 안됐고 성적도 떨어졌죠.
2학년 때 하숙 하고 나서부터 조금씩 성적이 궤도에 올라갔어요.
아침 7시 등교해서 8시 자율학습, 밤 12시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집에 와서 자고...다람쥐 쳇바퀴 도는 반복되는 생활에다 혼자서 객지 생활까지, 정말 외로웠죠.
그나마 학교 앞 서점 사장님이 정신적으로 많은 위안을 줬고, 그 덕에 힘든 학교생활을 버틸 수 있었어요. 감사하죠. 어째든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니 부모님께서 좋아하셨어요.
▲대학시절과 군대 생활은 어땠나요?
대학 입학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이학계열이 저와 맞지 않고 오히려 문과 공부가 제게 맞는 겁니다. 그래서 군대 가기 전 사법시험 공부를 3개월 하다 2학년 겨울방학에 군대를 의경으로 갔어요.
의경을 하다 보니 파출소에 근무하면서 법을 다루는데 있어 흥미를 느끼게 됐죠. 경찰을 흔히 거리의 법관이라고 하잖아요.
제 인생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로 인해 제가 변호사라는 꿈을 확고히 할 수 있게 됐죠.
제가 경기도 모 파출소에 근무할 당시 밤에 일명 삐끼(호객꾼)단속을 많이 했는데, 단속해서 파출소로 인계하면 안면 있는 파출소 직원들이 전화한통으로 풀어주는데 일선에서 단속하는 사람으로서 정말 힘이 빠졌어요.
그래서 이런 애로사항을 서장님께 건의했는데 다행히 서장님이 받아줬어요. 이후로 의경이 조서를 작성하고 경찰서로 인계하면 서류상 단속자와 인계자가 동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파출소 직원들이 마음대로 못 풀어주게 됐죠.
▲변호사가 되기까지 힘든 역경도 겪었을 텐데요.
네. 본격적으로 25살부터 변호사 공부를 시작했고 27살에 1차 시험에 합격했어요.
그런데 너무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공부하다보니 건강이 악화돼 2~3년 공부를 중단했어요.
몸을 충전했지만 공부가 안되다 보니 부모님께서도 직장을 알아보라고 권했어요.
알겠다고 했지만 포기할 수 없어서 5개월간 막노동으로 번 돈으로 다시 공부해서 1차 시험을 4개월만에 합격했죠.
하지만 주관식 서술에 약해 진로에 대해 다시 고민한 결과 영남대 로스쿨로 서른여덟에 입학을 결정해 3년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제5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할 수 있게 됐어요.
▲전주가 아닌 완주에 사무소를 개업했는데요.
완주가 10만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변호사가 한명도 없는 무변촌이잖아요.
그러다보니 여기 시골에 계신 어르신들이 법원까지 가는 교통편이 불편해 제대로 법률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애로사항을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서 이곳에 들어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곳은 저를 키워주신 고향이기도 하구요. 힘이 닿는 한 고향 분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어요.
물론 저의 지인들은 거의 만류했지만 아직 젊으니 도전하고 싶어서 결정했어요.
사무소가 고산6개면이나 삼례, 용진, 코아루 등 거리가 10분 내외라서 언제든 부담 없이 법률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앞으로의 계획, 포부에 대해
현실적으로 생계를 고민해야겠지만 군민에게 도움이 되는 변호사가 되고 싶어요.
제가 롤모델로 존경하는 김종오 변호사처럼 사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공익을 위해서도 발로 뛰는 변호사가 되어 억울하게 고소당한 사람들을 무혐의로 밝혀줌으로써 억울함을 풀어주는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다.
일적으로는 완주가 농업인이 많으니 기본적으로 농업관련 소송은 물론, 완주 공단이 들어서 있으니 노조 및 노동상담이 주를 이룰 것 같구요.
무엇보다 어르신들이 등기하려면 전주까지 가야하는 불편함이 있는데 그런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등기업무도 할 거구요.
또 소장이나 답변서를 작성 대행해주는 나홀로 소송도 적극 지원해줄 계획입니다.
아울러 거동이 불편해 사무소를 오지 못하는 분들을 직접 찾아가 법률서비스를 해드리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겁니다.
▲끝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까지 부모님께서 본인들은 제대로 입고 쓰지 못하면서 저를 가르쳐주셨는데 평생 잊지 않고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강직함과 어머니께서 물려주신 남에게 베푸는 마음, 그리고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해 주신 말씀을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덧붙여 ‘결과보다 과정에 중요하다’는 저의 좌우명을 실천에 옮기도록 할 거구요.
마지막으로 부족한 저를 믿고 반쪽이 돼 준 아내(박수진)와 9개월 된 아들 정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부끄럽지 않은 남편과 아버지가 될 것을 지면을 통해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