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3·5·10(3만, 5만, 10만원) 이 소리 잘못하면 오해 받기 쉽고 쪼잖다는 악담 듣기 마땅하다.
을 완주군민 입장에서 보면 ‘민주주의 진입법’, ‘평등 어울림법’이다.
돈 6만원(본인 포함)만 있으면 국회의원과 밥 먹을 수 있고, 5만원만 있으면 장관에게 선물할 수 있으며, 10만원만 있으면 고관하고도 친교(親交)할 수 있으니 이래서 ‘민주주의’, ‘평등’ 소리가 절로 나온다.
종전에는 돈 3만원 쥐고 ‘난사람들’에게 밥 먹자하면 두고두고 찍히고, 사장이 명절에 5만원짜리 선물 보냈다간 ‘누구 조롱하냐!’ 괘씸죄에 걸리며, 재벌들이 10만원 부의하면 국감에 걸려 구조조정을 자초 망조에 들어갔다.
완주군 초대국회의원 유준상·이석조부터 20대 안호영까지(박양재, 박영래, 이존화, 손권배, 배성기, 이정원, 최영두, 유범수, 유기정, 이철승, 김태식, 임방현, 최규성) 여러 의원을 보았다. 1960년대는 달걀 한 줄 들고 문병 가 고맙다는 소리 들었는데 8자 좋은 국회의원은 유정회의원 시절부터로 본다. 명단에 들면 국회의원이 됐다.
1950년대 민의원은 미군부대에서 불하받은 지이프차를 타고 등원했으며 비서 2인에 운전수 1인이 모두이었다. 집이 없어 셋집 살았고, 삼청동 국회관사에서 지냈다. 그러나 청백하며 자부심을 지녔고 어디서나 인간적인 대접을 받았다.
인태식 재무부장관이 삼청동 국회관사 이존화 의원을 찾았다가 ‘이런데서 어떻게 사냐’며 집을 마련해 준다 해도 거절했단다.
이존화 의원이 경찰병원과 서울성모병원에서 치료받을 때 삼종증손부(三從曾孫婦) 김명례가 간병했다.
신익희 선생 서거 당시 효자동 문상을 가니 골목에 세워 놓은 화환이 아니면 못 찾아 갈 정도로 깊은 데 사셨다. 이승만 대통령 이화장(梨花莊)도 넓은 집이 아니었다. 이제 우리 농민들 사람 대접받는 시절을 맞았다.
양판 한 포대(20kg), 마늘 한 접, 쇠고기 한 근, 곶감 한 접 보내며 기죽을 일이 없으니 이래서 ‘민주주의’ ‘평등’시대라 한다. 받은 것 많으면 없는 사람과 나눠 덕가(德家)로 소문나면 다음 선거에 유리하다.
이최응(대원군 형)은 열두 창고서 고기가 썩어 한강에 버렸단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되는데. 결국 하늘의 노여움을 사 나라 망하고, 소위 이왕가(李王家) 몰락양반으로 급전직하했다.
법에 걸릴까 봐 선물 적네! 많네! 할 말인가? 말년에 진짜 평안하려면 ‘김양란법’을 따라 ‘영란낭(囊)’을 차고 다녀라. 양복 사면 주머니가 실로 뜨여있다. 이를 풀지 않으면 이게 ‘영란낭’이다.
우리 완주군엔 ‘농산물’이 많으니 법률 안에서 많이 주며 특히 ‘받은 이’ 독식하지 말고 나눠 쓰면 위법이란 걱정 없다. 있는 것 나눠 쓰는 미덕이 우리나라 인심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