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민이 눈여겨 볼 상소문이 있다. 1778년(정조2) 8월 17일 윤면동(尹冕東)이 “…‘호남은 의관(衣冠:귀인)이 모여 있는 곳으로 홍지해(洪趾海:1720∼1777)ㆍ홍술해(洪述海:1722∼1777)의 향리이니, 반드시 그들에게 감염되어 기회를 노리다가 간사한 짓을 하려는 자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피바람이 불어올 이야기이다.
여기 ‘호남’과 ‘향리’는 어딜까? 봉동 구미리(龜尾里)이다. ‘홍지해’·‘홍술해’는 누군가? 영조·정조시대 남양홍씨 하면 엄청난 일이 많아 혜경궁홍씨 [한중록]와 사도세자 등 여러 사건이 떠오를 것이며, ‘홍지해’·‘홍술해’가 구미리에 살았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홍지해는 “본관이 남양(南陽), 자는 백미(伯美), 문과에 급제 정언을 거쳐 대사성, 이조참판,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를 지내며 정조즉위를 반대하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파직되어 북도(北道)에 유배되었고 다시 추자도(楸子島)로 이배. 이때 아들 홍상간(洪相簡)과 아우 홍술해ㆍ홍찬해(洪纘海)가 대역죄로 처형됨에 따라 함께 주살되었다.” 여기 홍술해 처는 효임(孝任), 아들은 상범이다.
홍술해의 4형제는 필해, 지해, 찬해이고 아버지는 판서 홍계희(洪啓禧), 할아버지는 홍우전(洪禹傳), 증조는 홍수진(洪受晉)이다.
고산 의 대성이 능성구씨(綾城具氏)로 학자 많고 벼슬이 좋았으며 문집 등 서책이 있어 고산연구에 이 집안의 협조가 필요하다. △큰집이 대윤(大倫) △작은집은 대우(大佑:호 취은)로 양파를 이룬다. 여기선 작은 집 얘기를 한다. 구대우→천(燀)→치중(致中:1590∼1659)으로 내려와 ‘치중’ 사위가 바로 ‘홍수진(洪受晉)’ 증 이조참판이었다.
홍수진의 계자(系子)가 홍우전(洪禹傳)으로 통정대부 수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通政大夫守慶尙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丘都護府使)를 했다. 고산면 소농리의 유명한 비석이 바로 ‘홍우전 신도비’이다.
정여립(鄭汝立)을 재조명하듯이 홍술해-효임-홍상범을 터놓고 연구해 벗겨 줄 죄 벗겨 주고, 정치적 입장은 정치적으로 풀어나가자. 믿을 분은 학자와 문인들이다. 문사들은 역사와 문화 인지도가 높으니 봉동을 띄우려면 홍씨 집안의 시시비비를 바르게 가려내어 완주 새판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이 방면에 박사학위 받은 사람이 있다. 충신·역적 옛날 정치 얘기는 빼고 홍씨들의 사정을 제대로 정리해 홍씨가 완주 먹여 살리는 시대를 열어보자.
영화 ‘역린(逆鱗)’을 기억할 것이다. 주인공이 바로 이들이다. 성력을 모아 ‘구호서원(龜湖書院)’ 백산재(栢山齋)까지 빛을 내자.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