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의병의 날, 6일 현충일, 25일 한국전쟁 등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완주군이 호국보훈 고장으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진왜란 때의 이치 및 웅치 전투 전적비를 비롯해 동학농민혁명 기념지, 독립운동 추모공원 등 호국보훈을 상징하는 곳이 다수 산재해 있기 때문.
■ 이치 및 웅치전투
우선 임진왜란(1952년·선조 25년) 당시 호남으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맞서 싸워 전주성을 지키고 호남 곡창지대를 왜군의 수탈로부터 막아내는 전과를 거둔 이치 및 웅치 전투 전적비가 있다.
당시 왜군은 주력부대를 둘로 나눠 한 쪽은 금산을 점령한 후 이치(梨峙·베티제)를 거쳐 전주를 공략하고, 다른 쪽은 장수·진안을 지나 웅치(熊峙·곰치재)를 넘어 전주성으로 진격했다.
이에 나라를 지키려는 1만2000여명의 무명 농민의병이 참전해 관군과 함께 결사항전으로 전쟁에 임해 승리를 거둠으로써,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현재 운주면의 이치와 소양면의 웅치에는 이를 추념하기 위한 전적비가 있는데, 올 3월 19일에는 이치전투에서 순국한 무명 농민의병을 위한 추념비가 제막되기도 했다.
※역사속으로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왜구들에게 전략적 요충지였다. 군량미 조달을 위해선 곡창지대인 호남평야를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데다 조선 7도를 장악하고도 전라도에는 발조차 붙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왜군의 위신과도 직결됐다.
1592년(선조 25년) 7월 왜군은 주력부대를 둘로 나눠 한 패는 금산을 점령한 후 이치(梨峙)를 거쳐 전주를 공략하고 다른 한 패는 안의와 장수 진안을 지나 웅치(熊峙·곰치재)를 넘어 전주성으로 진격한다.
이에 맞서 조선군은 전라도절제사 권율이 이치에서 왜구를 막아냈고 김제군수 정담은 관군과 소양면과 부귀면 주민 등 3000명을 규합해 웅치에서 1만 여명의 왜군과 대치하게 된다.
대둔산 기슭에서는 이치재 전투는 애국신념 하나로 익산에서 거병한 이름 없는 의병들은 군량, 무기, 훈련, 지원 병력도 없이 왜군 장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점령군의 무장 조총 병력 1만여 명과 하루 종일 공방의 백병전을 벌이다 머리 귀 코가 잘리는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
웅치전투는 금산을 점거한 왜군이 험한 웅치재를 넘어 전주방면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것으로,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김제군수 정담(鄭湛), 남해현감 변응정(邊應井) 등이 1592년 7월 8일 군대를 연합한 뒤 험한 지형을 이용해 왜군의 침입을 막았다.
장군 4명을 포함한 군사 3000명이 결사항전을 펼쳐 적병 수백명을 죽였지만, 전투력이 우세한 왜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전투 후에 웅치의 긴 고갯길은 조선군의 시체로 덮였다고 한다.
하지만 웅치전투는 전주를 지키는데 이들의 공이 실로 커서, 당시 권율장군은 행주산성의 전투보다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이와 함께 완주군은 봉건 정부의 수탈과 일본의 침략에 맞서 반봉건과 반외세를 목적으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의 2차 봉기와 최후 항전지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2차 봉기는 폐정개혁이 아닌 항일투쟁의 성격을 띠었는데, 삼례읍은 전봉준 장군이 동학군의 근거지로 삼은 곳이다.
특히 2차 봉기 당시 수많은 농민군이 삼례에 재집결했으며, 동학농민혁명 삼례봉기 역사광장과 기념탑이 당시 그들의 호국정신을 후손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아울러 농민군 최후 항전지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완주군의 대둔산 전적지가 있다. 이 곳은 농민군이 대둔산의 험한 산세를 활용해 일본군에 끝까지 항전했던 곳으로, 지금도 돌담 등 당시의 유적이 남아있다.
※역사속으로
동학농민혁명 1차 봉기를 빌미로 조선에 입성한 일본군은 내정간섭을 강화하였고 6월 2일 김홍집을 앞세운 친일내각을 설립하여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하였다. 이어 6월 21일에는 경복궁에 침입하여 고종을 감금하고, 23일 청ㆍ일전쟁을 일으킨 후, 25일 1차 갑오개혁을 강행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행태를 전해들은 전봉준은 일본군 척결을 위해 김학진과 손을 잡고 제2차 기병을 준비, 9월 18일 삼례에서 집결(제2차 삼례봉기)하여 서울로 향했고, 이는 반일감정이 쌓여 있던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 등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민중봉기가 확산되자 정부는 군을 출병시키고 일본에 출병을 요청하여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치열한 접전 끝에, 우세한 화력을 앞세운 일본의 개입으로 고전하다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했다.
■ 대둔산 최후 항전지
1894년 겨울 우금치 전투에서 패전한 고산지역 지도자 최공우를 필두로 접주 이상의 지위에 있던 농민군 50여명이 대둔산에 은거, 최후의 항전에 들어갔다.
이들은 추운 겨울 속에서 대둔산 형제바위를 중심으로 70여일을 버티며 대항했지만, 일본군의 공침에 버티지 못하고 25명이 전사하고 어린 소년 한 명만 생존했다고 한다. 대둔산 항전을 끝으로 동학농민혁명은 마무리됐다.
■ 완주독립운동 추모공원
이밖에 완주군 경천면 용복리에는 완주독립운동 추모공원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완주 출신의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28위의 애국애족정신과 위업을 기리고, 군민의 민족정기 선양을 위한 산 교육장을 마련하기 위해 조성됐는데, 총 1만446㎡ 부지에 사당, 기념관, 관리사, 정각이 건립돼 있다.
공원 내에는 독립운동 기념탑과 6.25 참전 기념탑, 베트남 참전 기념탑 등이 건립돼 나라사랑과 민족정기를 드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다.
※역사속으로
완주독립운동 추모공원은 완주 출신의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28위의 애국애족정신과 위업을 기리고, 군민의 민족정기 선양을 위한 산 교육장을 마련한다는 취지에서 경천면 용복리 278번지 일대에 조성됐다.
지난 94년부터 2003년까지 총 15억여원의 국비와 도비, 군비, 민간자본금이 투입된 독립운동 추모공원은 총 1만446㎡ 부지에 사당, 기념관, 관리사, 정각이 건립되어 있다.
특히 공원 내에는 독립운동 기념탑과 6.25 참전 기념탑, 베트남 참전 기념탑 등이 건립되어 나라사랑과 민족정기를 드높이는데 기여해왔다.
완주출신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 28위는 유현석, 유태석, 윤건중, 정대원, 정회일, 정기동, 전창여, 유명석, 유창옥, 유치복, 유연청, 유영석, 유연풍, 유연봉, 유준석, 양경삼, 이존철, 이정득, 김형진, 김형민, 장병구, 유지명, 김성찬, 박윤하, 박태련, 송쾌철, 정원국, 이유종 등이다.
그러나 그간 관리를 추진해온 광복회 전북도지부 및 (사)완주26위 애국선열선양사업회에서 관리에 어려움을 겪다, 지난 2012년 5월 완주군으로 기부채납을 했다.
이에 완주군은 독립운동 추모공원의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팔을 걷어부쳤다.
군은 그간 2013년에 독립운동추모공원 주변 및 화장실 보수공사를 실시했고, 2014년에는 CCTV를 설치하였으며, 지난 1월부터는 주차장 부지매입과 무궁화 묘목을 식재하였다.
또한 사업비 1500만원을 들여 앞으로 추모공원 활성화 용역도 추진할 방침이다. 아울러 경천면 주민들과의 협의를 통해 지역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방안도 모색키로 했다.
■ 기타
이와는 별도로 완주군은 또다른 호국보훈의 고장으로 유명한 경북 칠곡군과의 자매결연을 통해 이같은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완주군 관계자는 “지리적으로 주요한 곳으로 평가받는 완주군의 경우 역사적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선조들의 정신과 피가 연연히 흐르는 곳이다”며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완주군의 주요 기념지를 찾아 나라의 중요성을 재차 느껴보는 기회를 갖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