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서원’에는 ①박상충(1332∼1375) ②이성중(1331∼1411) ③박은(?∼1422) ④송유저 ⑤임사수 ⑥박소(1493∼1534) ⑦박종열 ⑧임치우 ⑨유기섭 9 선생을 모셨고, 연혁은 ㉠286년 전인 1730년(영조6 경술) 창건하여 5선생을 모시다가 ㉡1777(정조1 정유) 무너지고 기울자 ㉢1798년(정조22 무오) 복설했으나 ㉣1868(고종5 무진) 폐철되었다가 ㉤이듬해인 1869년(고종6 기사) 비석을 세워 ‘설단’하여 ‘백산’이라 이름 했으며 ㉥1904년(광무8 갑진) 단명을 지금의 ‘구호’로 고쳤고 ㉦융희 후 경술(1970) 중건 편액을 구호(龜湖)라 크게 붙여 오늘에 이른다.
담장 안의 건물 배치나 묘정비(廟庭碑), 현판(懸板), 기문(記文), 시판(詩板), 헌성록(獻誠錄), 청금록(靑衿錄) 외에 서원지(書院誌) 등 볼거리가 많다.
하나 하나에 예술과 문화 역사가 담겨있다. 전에는 남이 주로 향사했으나 세상이 많이 바뀌었으니 직손 박·이·송·임·유씨의 관심이 높아져야 거룩한 조상의 명성이 더 오래 유지 될 것이다.
가능하면 ‘백산재(栢山齋)’ 강당에서 글소리 울려 퍼지고, 사람들 발길에 댓돌이 달아 즐거운 비명 원임(院任)들의 기쁨이 넘쳐나야 한다.
‘명나라 사신 죽은 이야기(朴潘南)’를 비롯하여, 세상에서 오직 하나 뿐인 ‘검교(檢校)정승(李恕菴)’의 일화며, 태종 눈에 띈 ‘가난한 살림살이(朴釣隱)’, 개혁 주장에 ‘상 대신 불이익(宋雲谷)’의 수모, ‘잘도 아는 명필(朴冶川)’실화, ‘표리여일(表裏如一:朴蒼栢)’하다는 명문(銘文) 치하, 주변 사람의 ‘호평담(林從好齋)’, 두드러진 ‘효도와 우애(柳秋齋)’에 따른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나 여기 있어!’ 이은형, 이도형, 이형구, 박인규, 박찬호, 이종택, 전해권 옛 선비가 조언해 줄 것이다.
「서원기」, 「중건기」, 「중수기」, 「통문」등 명문이나 한자이므로 번역해 내면 앞 다투어 서로 달라할 것이며, 그 뒤부터는 무릎 꿇어 절할 학생 분명히 늘어난다.
1970년 준공 당시 참여로 이름 오래 전할 유사는 다음과 같다.
전태연·김경석·이겸래·정우봉·장병룡·김석철·이석원·정원보·이형구·전해권·유철영·이인구·전길권·최한홍·유영수·이한구·정완섭·강내희·이순구·유병수·유창희·이도형·김낙교·고영준·장대규·최일홍·이판구·전태춘·이규섭·이용구·이창섭·고석길·이은형·전중권·최응렬·이종천·조병인·이응삼·박형인·노동준·이문구·김세창·유영선.
든든한 박헌우(朴憲雨) 대표와 유옥균·이세원 외 여러 보(甫)의 정성이 귀암서원을 완주 으뜸으로 선양한다.
홍술해 전설을 세상에 끌어올려 정여립(鄭汝立)처럼 재조명해야 완주가 뜬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