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군 봉동읍 장기리에 소재한 완주떡메마을. 이곳은 장애인의 새로운 꿈과 희망을 위해 설립된 중증장애인 다수고용사업장이다. 100여명이 넘는 장애인들이 매일 50여 가지가 넘는 떡을 생산하는 완주떡메마을은 지난 2010년 2월 문을 연 이후 전국적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연일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매출 고공행진과 함께 장애인들의 꿈인 경제적 자립도 현실이 되어가고 있지만 지나온 과정 속에서 눈물의 성장통도 겪었다. 성장통을 몸소 경험한 양정숙 원장(44)을 만나 완주떡메마을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완주떡메마을은 완주군이 보건복지부에서 처음 시행한 2008년 중증장애인 다수고용 시범사업 공모 선정에 따라 시작됐다. 사업의 궁극적인 목적은 근로가 가능한 중증장애인이 마음 놓고 일하며 소득창출을 통해 자립할 기반을 마련해 주기 위한 것.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장애인의 소득 및 고용창출이 가능한 사업안을 검토한 결과 떡사업으로 확정짓고, 1년 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2010년 2월 6일 개관식을 갖고 사업이 본격화됐다. 하지만 사업 출발 당시 직원채용에 어려움이 많았다. 60세 이상의 지체장애 어르신 15명을 채용했으나, 농사철이 되면 자리를 비우다보니 생산에도 차질을 빚었다. “발품을 팔며 유관기관, 특수학교, 고용안정센터, 읍면사무소에 추천을 의뢰했어요. 지금 남아있는 친구들은 2010년 5월부터 저희가 지역에서 직접 발굴해서 훈련시켰던 아이들이에요.” 출발할 당시 생산직 6명, 사무직은 4명, 군에서 직접 운영을 하다보니 담당계장이 시설장을 겸직했다. 또한 떡 종류는 가래떡과 설기떡이 전부. 뿐만 아니라 방아, 시루, 찜기 등 기본설비는 갖췄으나 떡 전문가가 없어 출발은 다소 삐걱거렸다. “직업재활시설이니 우리는 훈련 프로그램만 하고 생산직은 따로 있어 그분들이 다 할 줄 알았어요.” 비장애인인 생산기사 역시 떡에 대해 잘 모르다 보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정숙 원장(당시 팀장)은 국방부에서 병사 생일떡 챙겨주는 것에 착안, 떡케익 샘플 6개를 들고, 사무국장과 함께 임실에 소재한 6탄약창으로 무작정 향했다. 떡케익을 보여주자, 만족한 듯 16개를 그 자리에서 주문 받았다. 2010년 2월 26일 첫 납품과 함께 계약도 체결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후 인근 학교에서도 급식에 넣어 달라며 주문이 들어오는 등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매출도 덩달아 늘기 시작했다. 문제는 가공실안에서 포장까지 하다 보니 공장이 비좁아 대량생산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 이일을 계기로 2010년 10월부터 찜기, 증기실, 포장실, 가공실 등의 시설을 보강하고 햅섭(HACCP)을 갖춰 문제점을 말끔이 개선했다. 2010년 3월 24일, 당시 이명박 대통령의 방문은 완주떡메마을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줬다. “청와대 대통령 하사품으로 떡국떡을 20만톤 가까이 납품했어요. 주문 받은 떡국떡을 만드느라 60일 동안 밤낮으로 쉬지 않고 일을 했죠. 20일 동안 방아가 한 번도 멈추지않았어요. 직원들이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무엇보다 이일을 계기로 직원들이 많이 성장했죠.” 대통령 방문 이후 육군부사관학교, 9585부대 등에 간식용 떡 납품 계약체결, 지역내 초·중등학교 급식 납품 계약체결 및 납품, 기관탐방, 체험프로그램 등이 잇따르면서 완주떡메마을은 인기상종가를 달렸다. 중요한 사실은 한정된 인원에 비해 주문량은 폭주했지만 단 한 번도 미루지 않고 기한 내 납품을 했다는 것. 물론 밤샘 작업이 뒤따랐다. “무엇보다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무직과 생산직,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분 없이 혼연 일체가 돼 열심히 일했기에 오늘의 완주 떡메마을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완주떡메마을의 성공적인 안착 뒤에는 눈물의 성장통도 있었다. 대다수 중증장애인이다보니 떡가공을 이해하고 현장에 투입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 따라랐다. 때문에 장애인들 각각의 특성을 분석, 반복숙달의 과정을 통해 생산에 투입하는 것은 필수였다. 공정마다 교사들이 일대일로 배치가 돼 교육이 이뤄지지만 숙련되기까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기다려주는 것 자체가 많은 인내를 요구했다. “처음에는 선생님들이 장애인들을 가르치는 것에 ‘죽어도 안 된다’고 했는데, 지금은 서로의 눈빛만 봐도 무엇을 원하는 지 척척 알 수 있을 정도니 그간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어요.” 이제는 지도하는 교사나, 생산기사, 직원들도 함께 일하는 장애인들에게 차별을 두지 않고 완주떡메마을 직원이라는 공통된 인식을 갖고 일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이 돼 있으니 여느 회사와 다를 바 없다. 이 때문에 시설이 개관한 지 올해 7년째인데 6년동안 계속 근무하고 있는 장애인들이 많다. 이직율이 적다는 방증이다. 실제 2010년부터 지금까지 근무하는 직원이 10명이 넘는다. 또한 전국에서도 손가락 안에 들 만큼 급여도 높은 편이란다. 이와함께 완주떡메마을의 강점 중 하나가 새로운 아이들이 오면 자존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선임 장애인 아래서 붙여, 가르치게 하는 것인데 효과가 높다. “직업재활의 기본 맥락은 장애인들이 여기 시설에 와서 경제적인 독립을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사회적으로 독립하는 것이죠. 비장애인들도 독립이 중요한 것처럼 장애인들과 똑같이 그것(독립)을 위해 노력한다는 거에요.” 지난 2009년 완주떡메마을과 인연을 맺은 후 줄곧 7년이라는 시간동안 동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값진 결실을 맺고 있는 양정숙 원장. 처음 근무할 당시 가래떡을 뒤집으러 나가기 위해 새벽에 5살 아들 어진이를 이불에 싸 운전을 하며 공장으로 데리고 나왔던 기억, 몸이 약해 못 낳을 거라던 둘째 우진이를 낳자, “떡메와서 떡 많이 먹어 아들 난 거니까 열심히 일하라”며 웃어주던 최연심 계장 이야기 등 양 원장의 가족사는 곧 떡메의 역사였다. “완주떡메마을은 무한한 능력이 있는 곳이에요. ‘장애인이, 선생님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어느 사회복지사들이 저렇게 일을 해?’ 하는데, 제가 겪어보니 그 안에 무한한 능력들을 갖고 있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곳이 우리 떡메마을입니다.” 본능적으로 장애인들과 이 안에서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소통하기 위해서 노력하자고 교사들에게 강조한다는 양 원장. 양 원장은 떡메의 자랑을 계속 이어갔다. “제가 다른 사업도 많이 해봤지만 이곳을 통해 함께 생활했던 장애인들의 삶이 저에게 무한한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우리 직원들은 장애인들을 통해 내가 살고 있고, 또한 많이 배우고 있다고 말을 해요. 떡메마을이 우리지역에 있다는 것이 큰 복이라고 누구에게나 저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1시간 넘도록 인터뷰는 계속됐다. 하지만 지루함이 없었다. 많은것을 생각하게 하고 그 안에서 감동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양 원장의 완주떡메마을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올해 사업 목표를 끝으로 인터뷰를 마친다. “올해는 생산라인을 구분해서 안정시키는 것은 물론 재고 떡 생산 시스템을 만들고, 무엇보다 노동강도를 반드시 해소하는 데 주력을 둘 것입니다. 최근 카페도 오픈하고 해서 40명이상 고용해야 할 것 같아요. 군민여러분들의 많은 성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최종편집: 2025-08-13 10:0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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