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동읍 구미리 서두마을에서 화훼 농사를 짓는 신현재씨(57). 꽃과 30여년을 동고동락했다. 지겨울 법도 한데 ‘꽃이 자신의 보석상자’라고 말하는 그가 선뜻 이해가 안 간다.
하지만 그의 지나온 삶을 들여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끈기와 열정, 지독한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농(大農)의 꿈을 이룬 신현재씨.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어쩌면 그를 위해 만든 노래일지 모르겠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삶속으로 들어가 본다.
신씨는 충남 금산군 진산면의 막현리라는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을이름이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다하여 ‘막현리’라 이름 붙여졌단다.
어린 시절을 배고픔 속에서 보낸 그는 유성농고에 진학 후 ‘절대 가난하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게 된다.
사실 유성농고는 그 당시 학교에 들어갈 가정형편이 안됐기 때문에, 수업료를 면제해주는 영농장학생으로 진학했다.
하지만 금산에서 대전, 다시 대전에서 유성으로 가는, 그것도 비포장도로를 매일버스를 갈아타며 다니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학교에 가면 11시 넘어서 도착하는 경우가 허다했어요.”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는 게 다반사였다고.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여름방학 무렵, 용인에버랜드에서 4주 동안의 실습은 오늘날 그를 만들어준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줬다.
“점심때까지 풀만 벴어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제초작업만 했죠. 겨드랑이에서 왕소금이 묻어 나올 정도로 너무 힘들었어요.”
현장실습을 통해 인내심을 시험하며, 인재를 골라 쓰는 용인에버랜드(중앙개발)의 채용방식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신씨.
어째든 면접에서 전국 80개 고등학교 학생 중 3등으로 합격한 그였지만 고졸이라는 꼬리표에 따라다니는 승진 등의 어려움, 실습의 힘든 경험 때문에 좋은 조건의 일자리를 거절했다.
당시 12만7천원의 월급과 두둑한 보너스를 챙길 수 있는 대기업을 뿌리쳤으니 부모님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돈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한 그는 담임의 소개로 익산의 한 식물원에서 5만원의 봉급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가난의 골이 깊어 꼭 자수성가 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무엇보다 그를 강하게 만든 것은 ‘용인의 실습’이었다.
“그런 힘든 시간도 극복했는데 이런 시간들을 이겨내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하루 10시간 이상 일하면서도, 잠은 2~3시간 밖에 자지 않고, 명절에 집에 가는 것, 친구들 만나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하고 4년 동안 오로지 일에만 전념했다.
이렇듯 농장에서 주야간 휴식 없이 일만하다보니 몸이 망가져 결국 그의 인생에 큰 위기가 찾아왔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무릎에 피가 고이는 병이었는데, 10군데 이상 병원을 찾아다녔지만 원인을 못 찾았어요.”
이후 수술을 했지만 제대로 무릎이 구부려지지 않는 등 결과가 좋지 않았다.
6개월 이상 병원에 입원하며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회복되지 않고 오히려 더 망가졌다.
“놀러 한번 안 가고 성공하려고 친구들도 안보고 한 우물만 팠는데 너무 억울했어요.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죠.”
재활은 고사하고 앉아서 도장을 파야하는 직업을 택해야 한다는 의사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 그는 악착같이 성공해야겠다고 마음먹고 퇴원을 결심했다.
퇴원 후 집에서 6개월간 혼자서 재활훈련을 하며 외롭게 자신과의 싸움을 했고, 힘든 재활 훈련을 견딘 그에게 마침내 병원장도 깜짝 놀랄 기적이 일어났다.
“조금밖에 펴지지 않았던 다리가 조금씩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다시 희망을 찾은 데에는 현재, 같은 마을에서 화훼농사를 하는 이기성씨(전주완주새농민회장)의 도움이 컸다.
농장에서 실습할 당시 전북대 실습생으로 왔던 이씨와 6개월이라는 짧은 만남이었지만 오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1989년, 친구 소개로 지금의 아내(김덕순, 54)를 만나 3년 연애 후 결혼했고, 그 무렵 이곳 서두마을에 먼저 정착한 이씨가 ‘혼자는 적적하고 힘드니 함께 일을 해보자’는 권유로 그는 봉동 구암리로 이사를 오게 된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집을 얻고, 가까스로 비닐하우스 하나를 임대 받았다.
농사지을 돈이 없으니 몸으로 떼웠다. 더욱이 처음 농사짓다보니 의욕만 앞서 실패를 반복했다.
“이상하게 거름을 주면 거름이 밑으로 빠져 작물이 자라지 못했어요. 땅의 성질을 잘 몰랐던 거죠.”
1993년, 이기성씨와 함께 서두마을로 이사와 용암리 금반리와 구암리를 오가며 농사를 계속했다.
서두마을 정착 후 조금씩 노하우도 생기고 농장도 늘려가면서 기반을 잡게 된 것도 이기성씨의 덕분이라고 칭찬했다.
“600평이 있으면 300평씩 나눠서 같이 짓자고 했어요.” 형제 이상으로 신씨에게 큰 힘이 되어준 고마운 사람이라고 몇 번을 반복했다.
힘들었지만 지원군을 만난 그의 사업에도 희망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물론 밤을 꼬박 새우기를 밥 먹 듯 하며, 차 없이 오토바이 한 대로 눈비를 맞아가며 꽃을 운반했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하우스 5천여평, 토지는 6천여평 이상을 가지고 국화와 백합 등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대농으로 성장했다.
8월에는 백마를 재배해 일본 오봉절에 맞춰 수출하고, 11월~1월까지는 백합을 수출한단다.
백합은 10만본~20만본, 국화는 많게는 13만본까지 수출해 소득도 올리지만 어려움도 많다.
“수출할 때 어려움이 많았어요. 엔화가 757원할 때도 수출했고, 작년 가을 엔저로 적자수출도 했었죠.”
또 하나, 우리나라 꽃소비가 퇴보한다는 것이다. “꽃이 하나의 문화가 돼야하는데 우리나라는 꽃이 경조사용 외에는 사치라고 생각해 소비가 줄고 있어요.”
GNP 3천달러인 카자흐스탄도 우리나라보다 꽃소비가 많다고 귀뜸해주면서 많은 홍보를 부탁했다.
이기성씨와 함께 봉동농협 공선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신현재씨.
그에게 성공 노하우를 물었다. “농업은 인내심이 필요해요. 놀기 좋아하면 안 되니 근면성실은 기본이죠.”
더불어 사람과 무슨 작물이든 끊임없이 관찰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1년 하고서 안 된다고 포기해서는 안돼요. 도전정신으로 끊임없이 자기혁신,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유통을 극복해야 안정적 소득이 가능하고, 결국 유통시스템의 혁신을 찾을 때 경영 안정화도 되고, 참여농가도 늘어난다는 것도 강조했다.
2박3일 해도 끝이 없을 것 같은 57년의 그의 삶. 못다 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2016년 계획을 끝으로 펜을 접겠다.
“완주화훼연구회가 지혜를 모아 침체된 화훼산업을 살리는 한해가 되길 바라고 무엇보다 철저한 자기관리를 통해 수출도 목표대로 달성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