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500년 전 사정을 제대로 알기란 쉬운 일이 아니나 마침 백비(?)를 보았다.
백비라는 확신을 얻기까지 두어 해 걸렸는데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조강리 한강변 남·북한을 가른 휴전선 철조망에서 불과 4∼500m 쯤 되는 전주이씨 묘역에 있다.
주인공 이수(李穟 :1458∼1516)는 1458년 1월 21일생이고, 어머니는 6월 24일 돌아가셨으니 젖을 빨아 보기 겨우 5개월 남짓 눈물 나는 얘기가 앞을 서나 가운이 열려 이복동생 목(穆:1471∼1498)이 장원급제를 했고, 이어 본인(40) 역시 문과에 합격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오는 등 명망이 날로 드높아지는 판인데 어뿔싸 1498년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초사건이 무오사화로 이어지자 똑똑한 동생 이목(28)이 비운에 갔다.
그 때 이수는 41세 멸문지화의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으며, 만일의 경우 분묘 실전 등 불안감에서였던지 마흔여섯 살이던 1403년 봄 아버지(윤생) 묘비를 세웠고, 곧 전주로 내려왔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 갑자사화가 터져 아우 이목은 부관참시 중형을 또 당했다.
2년 후 천운이 바뀌어 중종반정(1506)으로 관직에 다시 나와 충주목사 등 여러 자리를 거치더니 58세 때 어머님 홍씨가 별세하셨고, 자신의 몸도 성치 않아 낙향 전주에 ‘삼우정’을 세워 소일하다 1516년 59세로 서세하였다.
동시대의 대제학과 좌의정이었던 신용개(申用漑:1463∼1519) 지음 묘비명과, 후손 이태동(李泰東:1638∼1706)이 찬한 행장이 있다. 연대나 글 내용으로 보아 행장이 비문 같고, 비문이 행장 같은 점이 특이하다.
이수와 신용개는 다섯 살 차이 명료한 묘갈명(墓碣銘)이 족보에 어엿하나 비석에는 아무런 새김이 없다. 근래 새로 세운 묘비에 ‘오래 되어 비명을 읽을 수 없어…’라 했으나 구비(145×54×19cm)의 머리 부분과 받침돌 문양은 선명한 편이며, 바로 뒤편 1403년 세운 아버님 비문은 완연한데도 아들 당사자 비석엔 1점 1획이 보이지 않으므로 ‘백비’라 단정한다.
왜 백비일까? 쉰아홉 종세까지 참혹한 세상을 사시는 동안 묘비에 대한 당부가 있은 듯하며, 족보에 ‘예장(禮葬)’이라 했으니 나라에서 청백함을 송축하여 ‘백비(白碑)’를 내린 것으로도 보인다.
이 가설이 맞아 진짜 백비라면 장성 박수량(1491∼1554) 백비보다 30여 년이 앞서고, 2016년은 마침 이수 서세 500년이라 놀라운 만남이다. 이씨네 춤추며 잔치할 경사로서 한국금석문사상 길이 빛날 발견이기에 남북 사학자의 공동조사를 제의한다.
조카 세장(世璋) 본인이 받은 ‘청백리(淸白吏)의 영광’은 오로지 백부의 평생 훈도와 은혜로 여기고 ‘지극한 효심의 표상으로 백비(白碑)를 세웠다’해도 천륜 앞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조카를 위해 공주 생활도 했고, 충주목사 외직으로 나간 배경에는 ‘삶아 죽여야 마땅하다.’는 지탄을 받던 윤필상이 있었다. 조카가 백부에 대한 뜨거운 보응으로 볼 수 있다. 이 백비가.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
/한자 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