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운제’ 뜻은 옛날 싸울 때 성벽 타고 오르던 ‘사다리’이었으나, 여기서는 완주군 화산면 ‘운제리’를 말한다. 시골 전화번호 책에 겨우 19인(전엔 27인)뿐이니 화산면에서 가장 작은 마을[里:리]이다. 그러나 역사는 깊다. 서기990년 운제현 지불역(祇弗驛) 백성 차달(車達) 3형제가 “늙은 모친을 봉양하는데, 차달 아내 효성이 모자라서 쫓겨났으며, 이를 본 두 형제 장가들지 않고 셋이 맘 합해 잘 모셨다.”는 이야기가 『고려사절요 2권』에 있다. 운제는 옥포역(玉包驛)으로 유명했다. 이규보 에 “…감도는 산 따라 운제(雲梯) 이르러 고산(高山)가기까지, 위태로운 봉우리 드높은 고개 만인(萬仞 :1인은 8자)이나 솟았으며, 길이 매우 좁아 말 타고 갈 수 없었다. 고산은 여러 골 가운데 누추하지 않았다….”는 글을 남겼다. 이규보 또한 운제 물난리 소식을 듣고「…내가 일찍이 보았던 운제(我曾見雲梯)/ 바위 돌 바로 선 그 뒤엔(正在巖石裏)/ 백 길 드높은 산들(山有百仞高)/ 흙탕물 일을 곳 아니어라(泥潦所不至)/ 그 곁에 한 가닥 내도 없는데(傍無一丈川)/ 큰물 어디서 밀어닥쳤나(大水從何起)/…이렇게 읊었다. 1401년(태종1) 운제현을 고산에 붙여버렸어도 조선 500년→일정 35년→광복 70년 그 동안 615년간 ‘운제’가 살아있음이 기적 아닐 수 없다. 1930년대 중엽 옥포가 물에 잠겼다. 저수지 바닥 북쪽은 성북, 이남은 운제로 화산 땅이나 이름은 ‘경천저수지’다. 종리·와룡 외 9개리는 물이용 혜택이 전혀 없어 불만불평이 많다. 그러나 절묘한 면도 있다. 1894년 옥포역민(驛民)에게 신분세탁의 기회가 열려 멀리 떠나자 남은 사람 반·상처별 부담이 한꺼번에 해결됐다. 이런 일을 생각하며 당장 경남밀양호(密陽湖)에 달려가 배 띄워 돈 버는 법을 알아 와야 한다. 물까지 차별 받아서야 되겠나. 원래 ‘포(包)자’ 옥포(玉包)인데 소화 9년(1934) 전북지사 고원훈(高元勳)의 글씨 ‘옥포금성(玉浦金城)’을 물 나오는 구멍 위 돌에 새겼고, 새동네 물 차오르자 고깃배가 뜨니 숙명이라며 포구(浦口) ‘옥포(玉浦)’로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300번 오지 버스가 드나들어 요실금, 전립선비대증, 골다공증 할머니 할아버지가 수월하게 병원을 다녀 다행이다. 홧김에 떠나지 말고 큰소리 지르며 운제·옥포 지켜나가야 한다. ‘옥포로(路)’에 벚나무·이팝나무 심어 화려강산 자랑거리를 만들자는 의견이 나오면 관리·의원·주민 힘을 합해 죽어서라도 꽃길 달려드는 농촌을 만들어야 한다. 연약한 농민들 찾아오는 사람이라도 봐야 하지 않겠나. 종리에서 갈재 넘어 옥포 거쳐 큰길 꽃 보며 지나가게 하자. 000군 고시 합격자 나온 옥포 아닌가?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
최종편집: 2025-06-24 10: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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