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들어온 후 국사(國師), 대사(大師), 선사(禪師) 많이 나왔다. 지방민들 아직도 진묵대사(1562~1633) 어머니 묘 만경 ‘무자손 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 이야기를 비롯하여 많이 아는 편이다.
KBS 연락이 있어 금산사 송월주 스님 글 『풍류기담으로 일생을 풍미한 고승 진묵대사』를 봤는데 교계의 대가(전 조계종 총무원장) 논문이라 한 구절 의심할 필요가 없다.
문장이 길어 완주(完州)관련 부분과 개인 소견 몇 줄을 적는다.
김제 만경 출신 진묵대사 71수(壽)를 했는데 일곱 살에 출가 후 정여립 기축사옥(1589)에 이어 임진왜란(1592), 이몽학의 난(1559), 왜병재침(1597), 인조반정(1623), 이괄의 난(1624), 청태종 침입(1627) 등 어려운 일 가운데 ‘배불억교(排佛抑敎)’ 분위기까지 겹쳐 산사 수도가 쉽지만은 않았다. 잘 생기고 얼굴 예뻐 이름이 일옥(一玉)이란다.
법호 진묵(震默)에서 진(震)은 ‘진동할 진’, 묵은 ‘잠잠할 묵’이다. 글자로 보아 △떨쳐 일어나 세상을 진동시킬 것인가? △죽은 듯 꾹꾹 참고 묵묵히 견뎌야 하나? 고뇌 가득한 뜻 ‘진(震)’과 ‘묵(默)’ 사이에서 고뇌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누나 집 춘포면 쌍제리에서 몸 섬뜩한 일을 보고 ‘아서라. 나 갈 데 봉서사(鳳棲寺)’라며 찾아 가 사미(沙彌:어린 중)가 됐다. 옮겨간 운문암(雲門庵)에서 다각(茶角:차 끓이는 일)을 했다. 성년이 되어 한학자 봉계 김동준과 친했으며 진묵 술을 즐겼다.
당시 숨 막히는 세상 이럴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김기종은 최고 극찬 ‘괴위(魁偉)’라 했다.
월명암(月明庵)에서 17년을 지냈는데 비가 내려도 보이는 열여섯 별빛(?)이 있었다. 알고 보니 소양면 청량산 나한 도량 목부암(木鳧庵)에서 비치는 불빛이었다.
진묵대사 여기를 찾아갔고 이름을 ‘원등사(遠燈寺)’라 고쳐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훌륭한 대사의 전기나 자료가 귀함은 1636년 병자호란과 진묵대사의 뒤를 이을만한 제자가 귀하여 그런 듯하다.
선생님 종승(宗承)을 묻기에 42세 연상 서산대사를 지목했다. 이 말은 “니들 가운데 나를 계승할 자 없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구비(口碑)를 보면 △천렵하는 애들이 끓인 국을 먹고 뒤를 보니 고기(중태기)가 살아났다.
△전주남문시장에서 좌선 △해인사 화재 불끄기 △심신초탈 삼매경 △소금 눈 내리기 △여자관계 △왜막실 모기소탕 △『도감강목』59권을 걸어가며 읽고 책을 버렸다.
책 주인 이유를 물으니 ‘고기 잡으면 발 버리지 않느냐’는 반문이었단다.
진묵대사 석가모니신의 7차 화신으로 무사지(無師智)이다.
KBS 봉서사 안내 부탁을 받고 밤새도록 정성들여 살펴본 내용의 일부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