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면에서 오산(五山) 가장 ‘작은 산’이라하니 화산은 어떠냐고 묻는다.
원종과 궁평 사이 이름부터 특이한 ‘쇠똥뫼(메)’이다. 산이 워낙 작아 “‘소의 똥 무더기’만 하다”는 모양새의 의미가 있으나 사실은 ‘쇠[鐵:철]’를 다루던 곳이라 제철하고 남은 찌꺼기가 싸인 산이란 뜻의 ‘쇠똥메’.
이가 한층 더 합당한 이름이고, 대여섯 그루 소나무는 멀리서도 보였으며 여기엔 모정과 2기의 묘가 있었으나 묘주 나타나지 않자 같은 마을 아무개가 밭을 일궈 경작했지만 실은 이 땅 국유지이었다.
1970년대 누군가의 손에 길가 노송이 사라지니 괴담이 자꾸 일어나 ‘사필귀정’·‘인과응보’ 이런 말로 비약했다.
듣기 싫은 사람 미신이라 무시했지만 마을 판도가 크게 바뀌었다. 부자가 기울고 교통사고 등 어려운 일이 많았으며 떠난 자 소식이 끊겨 생사유무를 모른다.
무너진 모정 60년이 됐어도 복원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손 치더라도 쉬며 놀 사람 적다.
덩실한 함석지붕 창고가 있었고 700석 박 부잣집 아무개는 전주고보(현 전주고)를 나온 신교육 1세대였으며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청년 3∼4인은 해방 전 주민을 설득 마을과 큰길을 연결하는 ‘구르마(くるま:車)통로’를 낼 정도로 앞서가는 동네이었다.
《세종실록 지리지》 고산현 편을 보면 “철장(鐵場)이 1이요【현의 북쪽 번북동(番北洞)에 있는데, 연철(煉鐵)·정철(正鐵) 7백 4근 12냥쭝을 군기감(軍器監)에 바친다】”이런 기사가 있다.
쇠똥뫼 고산 북쪽 맞고 이웃에 마침 ‘번대(番垈)’가 있어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나저러나 쇠똥뫼 주변의 부슬부슬한 검붉은 흙은 제철과정에서 나온 부산물이 틀림없으니 조사 연구가치가 충분하다.
어찌된 일인지 가양, 궁평, 상와, 상룡, 임전, 원종에도 큰 나무가 없는데 주민들의 심성과 관계가 있지 않나 의문이야 가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1000년 갈 나무를 심어 가꾸기 바란다.
어려울 때 서로 돕고 살던 사람들이 한나절이라도 다시 만나 정담 나눌 큰 나무가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아버지 서영보, 아들 서기순 부자(父子) 대제학인데 서기순 속세 떠나 성남(城南) 오두막집에서 풍우를 가리지 못하고 살았다.”는 위인 이야기 속에 가난 서로 위로하며 즐기는 마을 되기 바란다. 어서 궁뜰을 찾아가자.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