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래 주지의 다른 이름은 형배이다. 원래 옥포(玉浦·玉包)에 살았는데 경천저수지 공사로 마을이 물에 잠기자 앞 재를 넘어 성가마골 큰 바위 아래에 보성암(普星庵)을 세웠다. 옥포는 현재 화산면 운제리(雲梯里)이다.
마을 이름 운제리라도 남아 신묘한 생명력에 경탄한다.
이 지역은 원래 고려 운제현(縣)이었으나 조선 개국과 함께 사라졌지만 규모가 큰 옥포역(驛)은 교통의 요지였다.
1930년대 저수지가 축조되면서 수백 년 된 옥포가 수몰되니 주민들 외지로 이사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때 차마 고향을 뜨지 못한 몇몇 사람들이 물위 산중턱에 집을 지어 오늘의 옥포마을이 되었으며 행정구역 ‘운제리’라는 이름을 붙잡아(?) 두어 고려조선 이야기를 하게 된다.
김승래 주지는 손재주가 좋아 절을 짓고 여러 시설을 그럴듯하게 꾸며내자 신도가 불고 시주가 있어 그런대로 유지되었다.
재주를 아는 들녘 사람들이 그를 초청, 상여를 만들었고 사례비를 주면 귀가하는 길 7∼80리를 걸어오는 동안 주막에서 쉬다 딱한 사람의 얘기를 들으면 지나치지 못하고 주머닛돈을 빼줘 사문(寺門)이 가까워질 무렵이면 빈손… 평생 이런 모습으로 살았다.
선고한테 들은 이야기다. 흉년에 기민을 주었고, 어느 해 에는 주민들의 세금 전액을 대신 내줘 목비를 세웠단다.
대동아전쟁이 끝나 남양군도와 관동지방에 끌려갔던 사람들이 돌아오자 절에 빌 일이 줄었고 여기에 선교사의 활약으로 기독교가 기세를 올리자 불도들이 이쪽으로 빠져나가면서 마침 6·25전쟁을 치르는 동안 갑자기 기울기 시작 결국 1970년대 문을 닫았다.
김승래 주지 아들 종열·종두 생각이 난다.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김산동 옹이 붓끝을 자극해 이 글이 됐다.
암자에서 하룻밤 자며 불공하는 모습을 본지가 어언 70여 년 오래된 기억 더 흐려질까 두려워 조급한 맘으로 아는 대로 적었다.
김두현 김산동 씨 출렁이는 물위에 배 띄워 줄 힘 있나. 양산 든 아가씨들 끊긴지 오래된 저수지는 웬 지 삭막하다.
맞은편 갓모봉, 황골, 돌다리, 쪽골, 거사리, 수락 사람 손마디 휘어 굽고 손금이 사라진 님들이여!
고향 얘기 속에서 웃음 잃지 마세나. 아궁이에 땔감 바위 아래 널려있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