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10월20일부터 성산(聖山) 김성배(金聖培) 목사가 삼례제일교회에서 시무했다. 아우가 김춘배(金春培)이고 양인 아버지 김창언(金昌彦)은 삼례 초대교회 신자였다.
삼례 출신 김춘배는 1934년 10월 함경남도 신창(新昌)주재소 격납고를 습격해 무기를 빼앗고, 19일 동안 종횡무진 함경남도를 누비며 일본 순사부장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 우리 고장의 일등 애국독립투사이었다.
김춘배·성배의 부친 김창언은 1910년대 삼례에서 가족을 데리고 만주 용정(龍井)으로 이사를 해 포목장사를 했다.
큰 아들 김성배가 독립군에 참여 활약했고 그 뒤를 따라 작은 아들 김춘배도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김춘배 의사는 1927년(당시 21살) 2월 만주 돈화현(敦化縣)에서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정의부군(正義府軍)에 가담 일본 영사관을 습격 간도를 뒤집어 놓았는데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일본 경찰의 협박에 못 견뎌 자수했다.
결국 서울서대문 형무소에서 8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며 탈옥도 시도해보았다.
김춘배 의사는 1934년4월 출감하자 다시 7개월만에 신창주재소 무기고를 털었는데 장총 6정, 권총 2정, 실탄 800발을 탈취 북청(北靑)어업조합을 습격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 독립군과 합류하려고 가다 그만 열차 안에서 붙들렸다.
잡히기 전 19일 동안 동원된 일제 경찰병력이 2만이었다고 한다.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또다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김춘배 의사는 해방과 함께 석방되었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길거리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김춘배 의사 아들 김종수(金鍾洙)는 1947년 아버지를 찾아 단신 월남했고 장성하여 전주기전여중고등학교에 재직했다. 아들 종수가 13년 8개월간 각 신문사와 유관기관을 누벼 자료를 찾아 56년만에 김춘배 의사는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았다.
당시의 신문 제목 △『근래 희유(稀有)의 함남(咸南)권총사건』 △『철옹성 경계망 돌파 경관에 발포』 △『북청에 홀현(忽現) 순사 부장을 또 사격』 △『신출귀목 19일간의 대단한 범적(犯跡) 극적장면』 △『연 2만 경관동원, 총 경비 2만원(圓)』. 삼례 민관 여러분의 감회가 궁금하다.
추모 모임을 발기할 인사 없으려나! 독립이 공짜로 굴러 온 게 아니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