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두 가지 뜻을 지녔다. 하나는 현재의 고산면이고, 다음은 옛 ‘고산군’시대의 동북 6개 면을 가리킨다. 1914년까지 고산군(郡)에 현내면(縣內面)이 있었고 이가 대체로 지금의 고산면(高山面)이다. 고산군이 전주부(府)와 합쳐져 전주군이 될 때 고산 두 자를 살려 면(面)자 앞에 남겼음은 천만다행 기적이랄 수 있다. 이는 마치 에서 용궁 간 토끼 이야기에 비교돼 눈물이 날 정도이다. 당시 ‘현내면’을 그대로 썼더라면 1400년 역사의 종말 ‘고산’이 영영 사라지는 판이었다. 이 아슬아슬한 고비를 넘겨 말단 행정구역일망정 ‘고산’의 지고한 역사를 지니고 이어간다. 그러므로 6개 면의 맏형으로서 모범이 돼야한다. 만일 헛발질을 하거나 실수하면 웃음거리 즉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長子權)을 팔아넘긴 ‘에서’ 꼴이 되고 마니 정신 차려야 한다. 그럼 ‘고산정신’이 무언가. 첫째,‘승리정신’이다. 1863년 5월 4일 고산장날 성난 화민(化民)들이 고영규, 고용규, 이상일 집을 습격하고 암행어사를 압박해 3일만에 ‘폐정을 고치겠다.’는 다짐을 받아내고 해산했다. 둘째, ‘대첩정신’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배재싸움에서 고산사람이 미적거려 배재가 터졌더라면 왜군은 일거에 고산을 거쳐 물밀듯 전주를 덮쳤을 것이다. 셋째, ‘산태미(산태기)정신’이다. 탐관오리를 몰아낼 경우 여자들이 자기들의 피 묻은 속옷을 동헌마당에 깔아놓고 ‘산태기’에 담아다 원산 너머에 내버렸다. 넷째, ‘생명존중 자비정신’이다. 외지에서 살려고 고산 땅 찾아들면 못 본 척 묵인했다. 다섯째, ‘책임정신’이다. 1920년 1만2천석꾼 고산 부잣집에 강도(?)가 들이닥쳐 9,600원을 털어갔다. 주모자는 만주에서 온 김진성이고 여기에 아들 고정식이 관련되었는데 아버지 고갑준은 모두 ‘내 아들 탓’이라며 책임을 떠안은 이타정신이 돋보인다. 독립자금과 관련된 사건으로 독립운동사에 기록돼야 한다. 아들 정식(貞植)은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 때 나이 스물여섯. 고산인은 이 다섯 가지 정신을 널리 알리며 정의의 바탕 위에서 권위와 정체성을 펼쳐나가야 상대할만한 인격자로서의 대접을 받게 된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
최종편집: 2025-06-24 09:4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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