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하여 한표 한표를 얻어 당선만하면 헌법기관 국회의원 그 무서운 힘으로 장관을 쥐잡듯이 한다.
우리 고장 당선자 여러분 중 몇몇 의원을 알아본다.
△유범수-사적인 일이지만 파일을 펼쳐보니 편지 29통이 나온다. 당시 초등학교 교원인 나에게 스물아홉 통 적은 수가 아니며 군민 여러 분에게도 보냈을 것이니 가히 편지 왕이라 할 수 있다. 다리군수로 유명했고 처음 호는 남계(南溪)이더니 글씨를 쓰면서 승당(丞堂)이라했다.
△이존화-‘되는 일도 못하는 일도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자기 한 일을 함부로 말하지 않고 생색내지 않는 성품 때문이었다. 국회문교분과위원장과 자유당조직부장을 하여 흔히 이승만-이기붕-이존화 서열 세 번째라는 평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 이름으로(가족 포함) 땅 한 평, 집 한 채 등기해 본 일이 없다. 2014년이 출생 100년, 서거 50년, 국회의원 당선 60년이었다.
△유기정-자서전 《더불어 잘 사는 사회》156면에 “…사무국장 이문구는 전주사범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 29살에 봉동면장을 역임하여 국회의원을 하면 훌륭한 업적을 남길 분이다”, “…운이 그 분에게 가지 않고 엉뚱하게 공천을 내가 받았다.” 이렇게 고백했다.
△최영두-1969년 5월 24일 “…어려운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시련이 부닥치겠지만 그래도 대자연을 벗 삼고 흙냄새를 맡으며 생활한다는 것은…” 이게 내가 받은 마지막 편지이고 그 후 40일이 되던 1969년 7월 4일 별세하였다.
완주 유권자들이 어려운 사정을 좀 알고 이끌어 함께 했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나이 46세였다. 2014년 11월 19일 한홍구 교수 글이다.
“예비역 준장 중앙정보부 기회실장을 지낸 최영두 의원은 작전 지휘권 이양이 국회의 비준동의를 받지 않아 원천무효라면서 1966년 10월 29일 폐기 건의안을 제출하였다”. 대단한 인물이었다. 이게 역사의 재조명이다.
△김태식-국회부의장을 했다. 완주문화원 건축에 애를 썼는데도 정작 기공식 날 보지 못했다. 이래서 세상 무상하다고 한다.
누구든지 업적이 있으면 잊지 않고 기억해 주는 것이 공과 사를 떠나서 인간의 고상한 도리이다. 인정이 인격이다. 봉동 삼례 고산 사람은 윤건중 전 농림부장관 기억에서 지우면 안 된다.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