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사람이 사는 곳은 어데나 길이 있다. 산에는 오솔길이 있고, 들에는 들길이 있다.
산길은 고개 넘어 마을을 넘나드는 오솔길이고, 들길은 이른 봄 바지게(지게와 바작)로 거름을 논밭에 내어 펴고 오곡을 심어 가꾸어 가을에 걷어드리는 좁다랗고 고불거리는 길이며, 신작로(新作路)는 소달구지가 삐걱거리며 짐을 싣고 지나가는가 하면, 화물차가 뿌-연 연기를 뒤로 내 뿜으면서 떨그럭거리며 달아난다. 이것이 50~60년 전의 길 풍경(風景)이였다.
이윽고 오늘날은 오솔길은 숲속으로 묻혀버리고, 들길과 먼지나는 신작로는 반듯 반듯하게 바로잡히어 시원한 아스팔트 길 위로 기계 문명의 꽃이라는 자동차들이 줄이어 땅끝이 어데냐고 싱싱 달리며 오간다.
바다에는 해로(海路)가 있어 국제간의 교류물자를 나르는 배들이 오대양(五大洋)을 누비는가 하면, 하늘에는 항공로가 있어 비행기가 배보다 좀 더 빠르게 지구촌을 왕래한다.
또 다른 하나 ‘큰 길’. 눈에 보이지 않는 큰 길이 있다.
즉, 인도(人道) 사람으로서 가야 할 바른길이 있다.
농사짓는 사람은 좀 더 수확을 올리기 위하고, 장사하는 사람은 어제보다 오늘에는 이윤을 더 남기기 위하여 오리(五里)보고 십리(十里)간다는 속설(俗說)도 있다.
과학하는 사람은 좀 더 발전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하는 천차만별 삶의 길이 있는 것이다.
어느 시인(詩人)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칭하였든가요!
그러기에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면서 개발을 명분으로 자연을 해쳐서 재앙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양육강식의 섭리를 휘두르면서 살고 있다.
어느 가요의 한 구절에 “인생은 나그네 길 어데서 왔다가 어데로 가는가”하는 노랫말이 실감난다.
무한대한 우주 가운데 조그마한 지구촌에 어차피 태어났음이라 길을 가야한다.
가면은 어데로 가느냐 끝이 어데냐 누구도 헤아릴 수 없다.
그러기에 선현(先賢)들께서는 사람들을 훈육하는 말씀에 “길이 아니거든 듣지도 말고 가지도 말라” 하였음은 농아가 되고 맹인이 되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바른길을 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첨단과학이 발달되어 인간사회는 갈수록 어지럽도록 복잡해져 살아남기 위한 물질문명 얼키고 설키어 나가고 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성자(聖者)들은 이를 예견(豫見)하여 인과응보(因果應報) 또는 내세(來世), 오륜(五倫)을 논하여 인간들이 사악에 휩쓸리지 않도록 계명(誡命)을 정하여 놓았다.
그러나 이 계명은 자꾸만 멀어져가는 것 같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인면수심 패륜행위는 그칠줄을 모르고 나만 살면 된다는 이기(利己)와 아집(我執)은 해를 갈수록 폭력과 입에 담을 수 없는 아악(雅惡)이 난무하여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되고, 방송국의 아나운서들이 목이 메이도록 외쳐대고 있음이 아닌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가정은 그 사회 구성의 기본이다. 가정이 화락해야 한다.
화락한 가정이 모아지면 건전한 마을이 되고, 건전한 마을은 다시 모여서 한 단위의 사회를 이루면 그 사회는 발전되기 마련인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정리(定理)이다.
가정(家庭)의 불목(不睦)으로 비인간적(非人間的) 행위가 발생하게 됨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입에 담기도 무서운 xx의 성추행, 공금과 사금(私金)을 혼돈하여 거금(巨金)을 휘두르는 귀밑머리가 희끗 희끗한 양반들 하나 둘이 아니여서 청(廳)을 드나드는 사태! 이 세상이 어데로 가는지?
국민의 안녕과 복지를 두 어깨에 메고 고민 정진해야 할 양반들 상탁하부정(上濁下不正)의 이치(理致)를 지금이라도 옷깃을 여미고 늦지 않으니 고심(苦心) 할 때이다.
/ 전우봉 (화산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