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8월14일 266대 프란시스코 교황이 한국에 와서 4박5일 동안 여러 가지를 보여주었다.
시복(諡福)된 윤지충은 전북 진산 사람으로 꼭꼭 묶여 지금의 운주→경천→화산→고산→봉동→용진→초포 땅을 밟고 끌려가 전주옥에 갇혔다가 전동성당 자리에서 처형됐다.
첫 순교자의 동생 윤지현은 도망 나와 운주면 ‘저고리’에 교우촌을 만들었고 주문모가 다녀갔다는 게 아닌가?
김대건 당진 솔뫼성지 이야기에 나바위성당이 빠질 수 없다. 이서면 초남리 유항검과 이루가다는 ‘세상에 그럴 수 있을까?’ 지고 지정한 동정부부이었다.
‘되재성당’이 한강 이남 최초임은 세상이 다 안다.
되재[升峙]는 4방이 됫박처럼 막혀 깊고 옴팍한 지형으로 충청도에서 여기 오려면 ‘밤아니재’를 넘어야했다.
낮엔 숨어들기 어려우므로 밤에만 넘었다는 게 아닌가.
‘밤을 낮처럼 생각하고 넘었다’해서 “밤아니 재”란다.
19세기말 프랑스 신부가 시무 중에 죽은 성지이다. 근래 복구한 새 성당 안의 칸막이는 옛날 모습 그대로여서 신기하다.
비록 신도 수야 적지만 찾아드는 손님이 더러 있어 복원한 가치가 충분하다.
양촌 운주에서 드나들기 쉽도록 수 10억원을 들여 ‘관통로(貫通路)’를 내자는 제안이 있는데 이는 처녀지 자연과 심오한 초기 신앙을 모르는 소치로 본다.
매파와 비둘기파에서 ‘매’가 이기므로 심히 걱정이다. 종교를 떠나 정치인과 지역사람 역사인식이 짧아 혼돈에 빠지면 나라가 흔들린다.
영향평가 자는 정신문화유산에 중심을 둬야한다. 진산 금산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윤지충이 더 한 층 우리 곁에 다가설 터인데 이 점이 안타깝다.
소양면에 흐르는 도도한 천주교 역사를 드높여 나가자.
화산면 가양리의 일명 조 감독 서봉댁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었다. 1940년대 큰물이 저 방안에 물이 차오르자 촛불을 켜놓고 ‘하느님이 죽지 않게 한다’며 안심시키던 모습이 생생하다.
종리교회를 연 오경목 선생은 인근 아이들을 모아 한문을 가르쳤고 당시 학생 김양회는 양우장학회를 만들어 후진을 도왔는데 올해 92세이다. 덕가는 대개 좋은 성품의 소유자이다.
깨달음이 즐거운 사람은 휴식 휴양을 겸해 “천호성지”를 꼭 한 번 찾아 가 보자. 자기가 보인다. 껍데기 분칠은 그만하고 속을 바꾸자고 외쳐보라.
/이승철(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칼럼니스트(esc269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