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가 좀 많아 팍팍하지 않을까? 완주군 화산면 종리에 임병택(1982 -1926) 선생이 살았다. 이 어른은 식물을 소재로 쓴 한시가 많으며 부인이 일찍 죽어 홀로 사신 기간이 길었지만 추하고 쓸쓸한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소 몰고 시냇가 지나려니(牽牛溪上過)/ 석양녘 풀 향기 물씬 나는구나(芳草夕陽多)/ 이러면 즐거운 풍년이랬지(爲此豊年樂)/ 고개 돌려 소리높이 노래 부른다(回頭一放歌)』 상투 꼽고 흰옷 입은 선비가 소에 풀 뜯기며 느릿느릿 거니는 모습이 선하게 보인다. 같은 시절 신화평 명당(明堂) 바람에 충북 영동에서 이사 온 전경표(1854-1944) 선비는 기 죽지 않으려고(?) 글을 많이 남겼다. 선생 시에 『여러 일 몸에 밴 게 하나 없어(百務未曾一着身)/ 소 빌고 연장 빌려 아내에 맡겼더니(借牛借?任閨人)/ 가을걷이 소출은 남은 게 없는데(秋來所穫無餘蓄)/ 대문 앞엔 언제나 손님으로 붐비누나(況復門前客到頻)』 오병훈(1870-1939) 선생 시도 멋지다.『새 떼 무리지어 벼논에 진을 쳐(鳥雀陳群下稻田)/ 벼 이삭 짓밟아 빨아대는데(足? 喙啄穗靡全)/ 새벽녘 나무 스친 바람결에(晨風一出穿林去)/ 언덕바지 노인네는 잠이 들었구나(阡上老翁閒自眠)』《교암집(임병택)》, 《삼수재수득록(전경표)》, 《정재유고집(오병훈)》두툼한 문집에서 한 수 씩 골랐다. 집집마다의 컴퓨터엔 명문과 귀중한 자료가 그득하다. 함부로 지우지 말고 정리해 두면 장차 생활과 사상 철학 교양 이념을 웅변해 줄 것이다. 아이들의 손재주를 보라. 모두 문장가 문필가다. ‘신 문예부흥기’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힘을 모아 을 번역해 서로 돌려보면 어떨까. 문화원을 비롯해 언론사와 학술단체의 책무가 이래서 중요하다. 간송 전우봉이 가끔 시 한 편씩 쓰니 다행이다. /이승철=국사편찬위/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